[2020년 청년 백인보] "안전 운행하고 승객에게 힘을 주고 싶어"…27살 지하철 기관사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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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준 기자
입력 2020-01-2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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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 분들 힘내세요. 이게 끝이 아니라 또 미래가 있습니다’

대부분 스마트폰이나 대화에 빠져 귀담아듣지 않는 지하철 방송이 누군가에겐 인생을 바꾼 한마디가 된다. 지난 3일 서울 동작구 신풍승무사업소에서 만난 이지원(27) 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수능을 망치고 정시 박람회를 가는 길에 들은 지하철 방송에 감명받아 본인도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지하철 기관사’라는 직업을 택했다.
 

3일 이지원 지하철 기관사가 7호선 청담역-뚝섬유원지역 구간을 운행중이다. [사진=정석준 기자]



“할머니께서 아무래도 여자가 그런 직업을 하느냐. 다른 직업을 알아봐라고 하셨는데, 기기를 다루는 직업이라 여자도 할 수 있다고 잘 말씀드렸어요. 주변 친구들은 자기들이 생각했던 기관사 이미지랑 너무 다르다고 해요. 아저씨를 생각했거든요”

서울교통공사가 관리하는 지하철2~8호선 1달 평균 총 운행횟수는 12만 건이 넘는다. 이를 3300명의 기관사가 책임진다. 이 중 1.8%만 여성 기관사다. 적은 비율이지만 느는 추세다. 지원 씨가 다녔던 기관사 면허 반은 30명 중 7명이 여자였다. 20%가 넘는 비율이다. 늘어나는 추세에 맞게 변화도 있다.

“여자 수가 적어서 쉬는 곳도 마땅치 않고 자는 곳도 불편하고 부족하지만 다들 변해가고 있고 회사 지원도 잘해줘요. 공채 1기 여자 선배께서 견습할 때 회사생활 팁도 많이 알려주셨어요. 가끔 여자라 주목받긴 해요”

◆ 승객들 안전이 제일···정작 기관사 근무 환경은 개선 필요해

사무실을 나와 신풍역부터 노원역까지 동행하면서 지원 씨도 똑같은 한 명의 기관사임을 느낄 수 있었다. 7호선 대부분 지하철은 자동운행이지만 스크린도어를 닫는 일은 수동이다. 그는 매 정거장 일일이 손으로 지적하고 복창하며 안전 확인 후 문을 닫았다. 종종 열차 맨 앞칸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을 향해 친절히 인사도 했다.

“저는 안전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운행해요. 가끔 우산이나 발부터 넣고 열어달라는 분들이 있어요. 다음 열차를 이용해도 2, 3분 차이인데 무리하게 타시는 분들이 많아서 생기는 사소한 지연이 쌓여서 큰 지연이 만들어져요. 불법 판매행위, 지하철 온도 등 민원이 들어오면 방송을 하고 최대한 승객분들에게 맞춰드리려고 열심히 하는데 아쉬울 때도 있어요”
 

지하철 맨앞에서 보니 선로는 끝없는 동굴이었다. [사진=정석준 기자]



안전운행을 위해 노력해도 예상 못 한 차량고장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지원 씨도 며칠 전 사고로 당황했던 경험을 털어놨다. 그는 “추진 장치가 고장 나서 영업운전이 더 이상 불가능해 승객들을 모두 내리고 기지로 들어가야 했어요. 조치 과정에서 객실로 가니 많은 분이 저만 보는 게 신기하고, 무서워하는 승객들을 보며 이 직업이 쉬운 직업이 아니라는 사명감을 느꼈어요”라고 말했다.

무거운 어깨에 비해 근무 환경은 열악하다. 운행시간이 전에 비해 길어져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다음 운행에 나서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안전 운행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어두운 공간에 혼자 계속 반복적인 일을 하면 힘들 때가 많다. 소음이 심해서 멍해지고 첫차나 막차의 경우 피곤함도 이겨내야 한다. 막차를 운행하는 스케줄이면 종점역사에서 서너 시간 잔 뒤 첫차를 운행한다.

7호선의 경우 2개 구간만 지상이라 빛을 보기도 어렵다. 그래서인지 한강다리를 지날 때 맞은 빛이 반가웠다. 창문을 여니 탁 트인 풍경과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 너무 행복했던 한해···주변 20대들은 여전히 '취업 걱정'

퇴근 후 지원 씨는 평범한 20대로 돌아온다. 기관사 특성상 스케줄대로 일하기 때문에 생활패턴이 불규칙하지만, 헬스나 필라테스 등 운동으로 극복했다. 여가시간엔 여행도 가고 친구들도 많이 만난다. 친구들 고민은 대부분 취업이라고 한다.

“요즘 취업시장이 워낙 어려워서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게 보여요.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낙담해 우울증 온 친구도 있고. 서류를 내도 잘 안 되고 가고 싶은 곳은 지원자가 너무 많아요. 어른들은 눈을 낮추라고 하는데 눈을 낮추면 연봉이 낮고, 요즘 친구들은 워라벨을 중요시하는데 그것도 안 좋으니 취직할 회사가 많이 없고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 같아요”

20대의 시선으로 본 지하철 풍경도 독특했다. 그는 “출근 시간에 정말 많은 분이 타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부지런하고 열심히 산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8년 12월 31일에 첫 발령을 받은 지원 씨는 이제 딱 1년차다. 회사 동기들끼리 모이면 자기가 겪은 사고나 운행 팁을 공유한다. 기기고장이 기관사 잘못은 아니지만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기관사 잘못으로 뒤집어지기 때문에 사고 대응이 중요하다.
 

이지원 기관사의 꿈은 50만 km 무사고 운행이다. 매 역마다 일일이 손으로 안전을 확인하고 출발한다. [사진=정석준 기자]



2019년은 이지원 씨에게 후회 없는 한 해였다. 그는 “2019년은 정말 행복했던 한해였어요. 입사하면서 취업 걱정도 덜고 하고 싶었던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한테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무엇보다 부모님이 제일 좋아하셨던 게 행복했어요”라며 “2020년은 안전운행이 제 1목표고 큰 사고 없이 올해도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고 친구들도 어서 취업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기관사가 된 계기인 ‘감성 방송’도 목표다. 지원 씨는 아침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힘을 주기 위한 멘트도 준해뒀다고 한다.

내리기로 약속한 노원역에 도착해 기관실 문을 열어줬다. 지원 씨는 “오늘 정도면 되게 무난한 여정이에요”라며 인사를 전했다. 취재 후 돌아가는 길에 가방을 끼워둔 사람이 있었다. 뒤이어 같은 무리가 타며 열차는 지연됐다. ‘사소한 지연이 큰 지연을 만든다’는 지원 씨의 말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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