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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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19-11-1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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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출처: media Buddha.net ]


[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다



산책길에서 목줄을 길게 맨 처음 만난 백구가 먼저 아는 척 하면서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손을 내밀고서 머리와 주둥이를 쓰다듬어 주었다. 덩치를 보니 방에서 키울 만한 크기는 아니다. 털에 때가 묻어있는 걸로 봐서 단독주택의 ‘마당출신’으로 보인다. 서로 안면을 익히자마자 견공은 주인이 가는 방향을 따라 몸을 돌리더니 골목길로 총총히 사라진다.

자주 마주치는 작은 멍멍이 두 마리는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는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온다. 덕분에 면식 없는 주인과도 자연스럽게 말을 섞게 된다. 미국에서 키우던 개라고 했다. 방안에서 같이 생활한다고 한다. 그동안 키운 정 때문에 남의 나라에 버리고 올 수가 없어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통관과정이 매우 까다로웠다. 검역을 대비하여 방역주사를 맞혀야 하는 절차가 뒤따랐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찮다. 게다가 비행기 운송비까지 더해졌다. 많은 지출 이후에야 비로소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이 산책을 좋아하는 까닭에 주인장은 집 밖으로 나오기 싫은 날도 할 수 없이 따라 나오게 된다고 한다. 덕분에 억지로라도 운동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니 그것도 덤으로 얻는 고마움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산책길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 부류는 반려견들이다. 이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탓인지 만나는 개들마다 대부분 갖가지 디자인으로 장식한 옷을 입혔다. 모자까지 쓴 녀석도 있다. 강아지를 유모차에 태우고서 그것을 밀면서 산책하는 어르신도 보인다. 눈길의 방향을 돌리니 담장에는 못보던 A4용지가 붙어있다. ‘개를 찾습니다’라는 벽보였다. 사례금도 걸려있고 동물병원에 입원이 예약되어 있다는 사족까지 달았다. 꼭 찾고야 말겠다는 간절함이 절절이 묻어난다. 또 맹견은 입마개를 하고 용변은 반드시 치우라는 산책지침서도 군데군데 보인다.

그리고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지말라는 경고문도 걸려있다. 그런 행동은 사랑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학대라는 부연설명까지 한줄 더 붙였다. 스스로 먹이를 찾는 건강한 생태계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부한다. 언제부턴가 비둘기가 제대로 날지도 못할 만큼 피둥피둥 살이 쪘다. 그래서 ‘닭둘기’라고 놀리듯이 부른다. 하지만 알고보면 닭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잘 날아다녔지만 땅 위에서 맛있는 것을 너무 많이 먹다보니 몸이 무거워져 날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날짐승이 아니라 길짐승으로 아예 편안하게 정착했다. 하지만 목숨이 위태로워질 정도가 되면 가끔 옛날 실력을 발휘하곤 한다. 위해를 가하려고 쫒아오는 개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퍼더덕 소리를 내며 날아서 지붕 위로 피신했다. 그래서‘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라는 속담이 나온 것이다.

사람도 본래 날아다녔다고 한다. 그때는 신선들과 함께 놀았을 것이다. 하지만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는 바람에 몸이 무거워져 날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광음천자생인간(光音天子生人間 광음천자가 인간세상에서 살다)’이라는 신화에서 그 일단을 엿보게 된다. 광음천(光音天)이라는 하늘세계에 살고 있던 신선들이 인간세계로 나들이를 왔다. 그런데 땅 위에는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았다. 대지의 비옥한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탐욕을 부린 신선들은 결국 몸이 무거워져 다시는 자기가 살던 곳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땅 위에 눌러앉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어디 신선뿐이랴. 인간세상도 지금보다 몸이 더 무거워지면 곤란해진다. 그렇게 되기 전에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말을 좌우명 삼아 자주자주 걸어야 할 것이다. 어쩌다보니 날아다니는 것은 잊어버렸지만 음식 때문에 걷는 것조차 잊고서 누워있을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규칙적으로 자주 걸어주면 아침에 일어날 때 ‘날아갈 것처럼 몸이 가뿐한’신분상승의 새세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서 오늘도 산책객들은 비장한 표정으로 열심히 걷고 있다.

집안에는 인간과 가축(家畜)이 함께 살고 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이다. 사람은 자기 손으로 먹이를 구하지만 가축은 남의 힘을 빌려 먹이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축생(畜生 畜:기를 축)이라고 부른다. 만약 사람도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눕는 일이 생긴다면 결국 남의 힘을 빌리게 된다. 신선세계에서 내려와 음식 때문에 인간세계에 살다가 다시 축생세계까지 다녀와야 할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야생오리를 만났다. 차가운 계곡물의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자맥질을 통해 자기 먹이를 스스로 구하면서도 유유히 물 위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다. 물론 다리부분은 한없이 바쁘긴 하다. 피곤하면 잠시 땅과 바위 위에서 휴식을 한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오면 물이 얼 것이고 먹이 구하기는 더욱 어렵겠지만 그마저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마지막에는 어쩔 수없이 따뜻한 지방으로 날갯짓을 통해 이동하겠지. 비록 땅 위에 살고있지만 결코 날아다니는 것을 잊어버린 적이 없다. 땅 위에 살면서 과도한 음식섭취로 몸을 무겁게 만들지도 않는다. 하늘과 땅과 물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절제된 삶의 모습 속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편안한 삶이라는 집오리의 길을 거부하고 힘든 야생오리의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 사료를 먹는 가축이 되면 그 순간 축생세계로 떨어지고 그것이 바로 ‘신분하락’임을 이미 알고있는 까닭이다.



 

[원철 스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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