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의 Now&Future] 소재·부품·장비의 탈일입구(脫日入歐) 전략은 가능한가

곽재원 수석 논설위원 입력 : 2019-10-28 13:15
 

[곽재원 교수 ]


[곽재원의 Now&Future] 일본이 산업에 긴요한 소재·부품·장비 기술을 무기로 한국에 경제 공세를 가해온 지 3개월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는 탈(脫)일본·극(克)일본을 기치로 내걸고 이른바 기술자립화 운동을 펼쳐왔다. 그 방편 중의 하나로 일본과 중국을 제치고 독일 등 유럽에서 가능성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른바 탈일입구(脫日入歐)의 모색이다.

사정은 사뭇 다르지만 과거 일본이 탈아입구(脱亜入歐)로 나갈 때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시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탈아입구는 일본 개화기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일본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이다.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는 1885년 3월 16일 일간신문에 ‘탈아론’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보수적인 청나라와 조선부에서 벗어나 서양과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탈아론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서구화 바람이 동양을 향해 불어오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모든 국가는 서구사회와 더불어 이 운동에 동참하여 문명의 열매를 맛보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명화 과정에서 보수적인 정부는 걸림돌일 뿐이며 이를 뒤집어야만 일본에서 문명화를 이룰 수 있다.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시아를 벗어나는 것(脫亞)‘이다. 비록 일본이 이미 정신적으로는 아시아를 벗어났지만, 이웃의 두 나라 (한국과 중국)는 개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개혁이 실패한다면, 이들은 곧 세계열강에 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

일본은 1868년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현대 일본의 출발점으로 삼아, 탈아입구를 지향했다. 이를 통해 추진할 국가전략의 핵심은 ‘부국강병(富國强兵)과 식산흥업(殖産興業)’이었다. 군·산복합경제를 노린 이 전략은 비록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참패로 타격을 입었지만, 오늘날 경제대국 일본을 가능케 한 유산으로서 굳건히 존재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그 유산의 가치를 재평가하며 ‘강한 뉴 재팬’을 그리고 있다. 21세기형 군·산복합경제의 징조가 엿보인다.

그러던 차에 역사 문제에서 한국과 마찰이 일자 아베정권이 그 야심의 한 자락을 슬쩍 드러낸 게 소재·부품·장비의 수출 견제다. 일본의 오래된 모노쓰쿠리 기술 (장인정신을 담은 제조기술)에 바탕한 소재·부품·장비 기술은 부국강병과 식산흥업을 떠받쳐온 유산이며, 곧 일본의 상징이다. 당시의 개항→개국→근대화로 이어지는 숨 막히는 드라마 속에서 일본은 압축성장하며 서구와 같은 반열에 올라섰다. 작금의 한·일 경제 마찰은 일본 근현대사를 파악하면 한층 명료해진다.

지금 한국은 미심쩍은 이웃 중국과 일본을 넘어 유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창조경제를 내세우며 스타트업 국가 이스라엘에 올인했다. 이명박 정부 때에는 지식경제의 기치아래 ‘히든 챔피언’의 독일을 찾았다. 노무현 정부 때에는 창업과 혁신을 외치며 핀란드 등 북유럽국가를 드나들었다.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언제 어느 때고 찾아가는 안방극장 같은 존재다. 정권마다의 순례길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었는지, 또 무엇을 남겼는지 알 길이 없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소·부·장 자립화가 강조되고 있는 만큼 독일로 가는 발길이 많을 것 같다, 유행 따라 가는 순례길이 아니라 진정한 탈일입구의 길은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예컨대 독일을 벤치마크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제4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인더스트리 4.0의 진화과정을 살펴야 하고, 지멘스나 보쉬같은 대기업은 물론 유력한 미텔슈탄트(중소기업)들의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독일이 금융자본주의의 대표적인 국가이며 노사정협의와 숙의(熟議)민주주의가 가능한 체제라는 점도 눈여겨봐야 한다.

독일의 국가연구기관들도 막스 플랑크 (노벨상을 노리는 기초연구), 헬름홀츠(거대기술과 미래기술) , 라이프니츠(응용연구) , 프라운 호퍼(돈되는 생산기술) 등 각각의 역할이 확실히 주어져 있다는 사실도 주지해야 한다.

영국을 본다면 유력한 대학과 우수한 기초과학 전통을 바탕으로 한 과학기술 이노베이션 시스템을 파악하고 세계의 선진 대열에 낙오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도전정신을 주시해야 할 것이다. 유럽 이탈 이후 영국의 변신도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그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가. 거대한 기초연구기관인 국립과학연구센터(CNRS)가 중심이 되어 전국 837곳의 대학 건물 내에 설치한 ‘혼성연구유니트(UMR)’를 주목해야 한다. UMR은 프랑스 공공부문 11만명 가운데 약 절반의 연구자와 교육자가 조직적·물리적으로 함께하는 혼성상태를 이루고 있다. 대기업·중소기업· 스타트업들이 연구자와 팀을 파견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박사과정과 박사후 과정도 들어있다.

문재인 정권의 과학기술정책과 산업정책은 소·부·장 자립화전략, AI 국가 전략, 제조업 르네상스 전략의 틀 속에서 가동된다. 이 가운데 소·부·장은 선도전략으로서 매우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시간표와 로드맵을 잘 그려야 한다.

뿌리 깊은 일본의 의존을 벗어나 흔들리지 않는 소·부·장 강국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한국은 탈아입구의 많은 유산을 가진 일본에 대적해 역사가 없는 탈일입구의 길을 택했다. 문재인 정부가 말하는 가보지 않은 길의 하나다. 소·부·장에서 탈일입구, 정말 제대로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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