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미·중 기술냉전, 슈퍼컴퓨터로 확전

베이징=이재호 특파원입력 : 2019-06-27 00:01
中 슈퍼컴퓨터 굴기에 美 본격 견제 성능은 엇비슷, 수량은 중국이 우위 美 제재 직격탄, 반도체 경쟁력 관건

[그래픽=이재호 기자]


반도체와 5G 기술 분야에서 시작된 미·중 간 기술 냉전이 슈퍼컴퓨터 영역으로 옮겨 붙는 모습이다.

슈퍼컴퓨터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핵심 인프라로 꼽힌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의 기술이 제대로 구현되려면 그에 걸맞은 슈퍼컴퓨터 성능이 뒷받침돼야 한다.

특히 군사·안보적 중요성이 높아 미·중 패권 경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이기도 하다.

중국의 슈퍼컴퓨터는 성능 측면에서 미국과 대등하고 수량으로는 미국을 훨씬 앞선다. 미국이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는 이유다.

다만 슈퍼컴퓨터의 핵심 부품인 중앙처리장치(CPU)를 비롯한 반도체 칩 기술은 미국이 서너 발 앞서 있는 게 사실이다.

결국 중국이 반도체 등 핵심 기술 경쟁력을 얼마나 빨리 확보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으로 예상된다.

◆美 제재, 中 첨단산업 굴기 억제 전략

미국 상무부는 지난 21일(현지시간) 중국 슈퍼컴퓨터 관련 기업 및 연구소 5곳을 거래제한 명단(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중커수광(中科曙光)을 비롯해 톈진하이광(天津海光), 청두하이광(成都海光)집적회로, 청두하이광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테크놀로지, 우시장난(無錫江南)컴퓨터테크놀로지연구소 등이다.

미국 상무부는 "국가 안보나 외교 정책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미국 기업은 당국의 승인 없이 이들 기업 및 연구소와 거래를 할 수 없다.

제재 대상 기업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중커수광은 중국과학원에서 분리돼 나온 첨단기술 기업으로,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고 범용 서버 및 메모리 장비를 제조한다. 중국 최초의 슈퍼컴퓨터 '싱윈(星雲)'을 개발하기도 했다. 미국은 중커수광이 중국 인민해방군에 군사적 용도의 슈퍼컴퓨터를 제공한 것으로 의심한다.

2014년 설립된 톈진하이광은 중커수광이 지분 36.44%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사명에 '청두하이광'이 붙은 두 기업은 톈진하이광의 자회사다. 사실상 한 지붕 내 기업들인 셈이다.

1951년 설립된 우시장난연구소는 중국에서 최초로 컴퓨터 과학과 기술 공학 연구를 시작한 곳으로, 2003년부터 컴퓨터용 칩 국산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우시장난연구소는 인민해방군 총참모부 산하 '제56호 연구소' 소속이다.

종합하면, 미국은 최근 중국의 슈퍼컴퓨터 굴기 작업을 선도하고 있는 기업 및 연구소를 향해 칼을 들이댄 셈이다.

일각에서는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이번 제재 조치를 단행했다고 분석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오는 28~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따로 만나 담판을 벌일 예정이다.

중국 내 민간 싱크탱크인 타이화연구소의 딩이판(丁一凡) 수석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을 앞두고 상대에게 극한 압박을 가하는 것을 즐긴다"며 "이번에도 중국의 기술 수출품 규제를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중 간 무역전쟁과 기술 냉전을 별개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중국의 첨단산업 발전을 억제해 기술 패권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미국의 전략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서우웨이(王首偉) 국제거버넌스전략연구소(IIGS) 주임은 "첨단기술 분야를 둘러싼 미·중 간 전략적 게임, 특히 기술표준 주도권 다툼은 무역전쟁보다 더 치열하고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미국의 화웨이·ZTE 제재 등은 시작에 불과하며 중국의 기술 혁신과 첨단기술 부상을 억제하기 위한 후속 조치들이 이어질 것"이라며 "중국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이재호 기자]

◆中 슈퍼컴퓨터 역량 어디까지 왔나

각국이 슈퍼컴퓨터 기술을 겨루는 각축장인 '슈퍼컴퓨팅 콘퍼런스(ISC)'에서는 매년 '글로벌 톱 500 슈퍼컴퓨터'를 발표한다.

현 시점에서 최고 성능의 슈퍼컴퓨터는 미국이 보유하고 있다. 미국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의 '서밋(Summit)'이 1위를 차지했다. 연산 능력은 148페타플롭스(PF)로 측정됐는데, 페타플롭스는 1초에 1000조번 연산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2위는 미국 로런스리버모어 국립연구소의 '시에라(Sierra)'로 94페타플롭스다. 3~4위는 각각 중국의 '타이후즈광(太湖之光·93페타플롭스)'과 '톈허(天河)-2A(61페타플롭스)'가 차지했다.

최고 성능의 슈퍼컴퓨터 순위만 보면 미국이 중국에 앞서 있는 것 같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도 않다. 미국이 1위를 재탈환한 것은 지난해로, 5년 만이다. 그동안은 중국제가 1위를 질주해 왔다.

양적인 측면에서는 중국이 미국을 압도하고 있다. 올해 ISC가 발표한 톱 500 슈퍼컴퓨터 중 중국이 보유한 것은 219대로, 비중이 43.8%에 달한다. 미국은 116대로 23.2%에 불과하다.

추이를 봐도 중국은 2017년 202대, 지난해 206대, 올해 219대 등으로 증가속도가 빠르다. 같은 기간 미국은 144대, 124대, 116대 등으로 감소하는 중이다. 톱 500 순위에 포함된 슈퍼컴퓨터는 모두 페타플롭스급이다. 슈퍼컴퓨터 개발 및 제조에서 중국이 경쟁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슈퍼컴퓨터 '누리온'의 성능이 15위(14페타플롭스) 수준인 데다, 톱 500 내에 포함된 슈퍼컴퓨터가 5대에 불과한 점만 봐도 중국의 슈퍼컴퓨터 경쟁력을 가늠할 수 있다.

미·중 간 슈퍼컴퓨터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양국 모두 기존 페타플롭스급보다 1000배 빠른 엑사플롭스급(엑사급) 슈퍼컴퓨터를 2~3년 내에 상용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3월 미국 연방 에너지부와 산하 아르곤국립연구소는 인텔·크레이 등 정보기술(IT) 기업과 공동으로 엑사급 슈퍼컴퓨터 '오로라(Aurora)' 개발에 나선다고 발표했다. 총 5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했으며 2021년 가동 목표다.

미국 반도체 기업인 AMD도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와 공동으로 엑사급 슈퍼컴퓨터 개발을 시작했다.

앞서 중국은 지난해 10월 엑사급 슈퍼컴퓨터 '수광(曙光)'의 시제품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힌 바 있다. 향후 수광의 성능 업그레이드와 슈퍼컴퓨터 기반 시설 개선을 위해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을 계획이다.

중국 칭다오 해양과학기술국립연구소와 톈진 국립슈퍼컴퓨팅센터, 선전 국립슈퍼컴퓨팅센터 등도 각각 2020년과 2021년, 2022년에 엑사급 슈퍼컴퓨터를 도입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미국 핵심부품 공급 중단 여파는

슈퍼컴퓨터는 질병 치료 등 의료 분야와 날씨 예보, 민간 과학 분야 발전의 필수품이다. 4차 산업혁명의 꽃으로 불리는 AI와 빅데이터 영역에서도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특히 군사·안보적 가치가 높다. 전투기와 잠수함, 미사일은 물론 핵무기 성능 테스트에도 활용된다.

실제 미국이 개발 중인 엑사급 슈퍼컴퓨터 오로라의 경우 주요 임무가 핵폭발 시뮬레이팅이다. 핵무기 개발에 슈퍼컴퓨터를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행보는 중국이라고 다를 리 없다. 미국이 중국의 슈퍼컴퓨터 굴기를 경계하는 배경이다.

미국 상무부의 제재 조치로 핵심 부품 공급이 중단되면 중국의 슈퍼컴퓨터 산업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중커수광과 시스템 반도체 IP(지적재산권)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던 AMD는 계약 기간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조만간 AMD 기술을 활용한 시스템 반도체를 제조·탑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컴퓨터의 두뇌에 해당하는 CPU 시장 점유율이 90%에 육박하는 인텔 역시 공급 중단 조치에 동참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 입장에서는 차포를 떼고 장기를 둬야 할 처지다.

관건은 중국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반도체 산업 육성 전략이 얼마나 이른 시일 내에 성과를 낼 수 있는지 여부다. 이는 슈퍼컴퓨터 분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미·중 간 기술 냉전을 관통하는 화두이기도 하다.

왕서우웨이 주임은 "첨단산업 혁신 및 응용 분야에서 새로운 산업 사슬과 공급 사슬, 가치 사슬을 구축하는 게 핵심"이라며 "혁신 체계와 능력을 현대화하지 못하면 미국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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