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식스’ 이정은, US여자오픈 제패까지…美 접수한 ‘생계형 독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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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교 기자
입력 2019-06-03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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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 권위 대회서 데뷔 첫 우승 ‘메이저 퀸’

  • 장애 아버지 둔 ‘효심’ 탓에 미국 도전 망설여

  • 먹고살기 위한 레슨코치 꿈꿨던 ‘순천 소녀’

  • 국내 평정 뒤 박성현 잇는 엘리트 코스 밟아


여자골프 최고 권위의 US여자오픈 메이저 무대. 전남 순천에서 소박한 레슨 코치를 꿈꾸던 한국 소녀가 전 세계 골프 선수들이 꿈꾸는 US여자오픈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국내 무대를 평정하고 올해 미국에 진출한 이정은(23)은 우승이 확정된 순간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는 “지금까지 우승한 어떤 대회보다 느낌이 다르다. 지금까지 힘들게 골프를 했던 것이 생각나 눈물이 나는 것 같다”며 울먹였다.
 

이정은6이 미국 진출 이후 최고 권위의 US여자오픈에서 첫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고 활짝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이정은이 3일(한국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컨트리클럽 오브 찰스턴(파71)에서 열린 제74회 US여자오픈(총상금 550만 달러) 최종 4라운드에서 1타를 줄여 최종합계 6언더파 278타로 우승했다. 2타 차 6위로 출발한 마지막 날 펼친 역전 드라마였다. 이정은은 우승 경쟁을 벌이던 셀린 부티에(프랑스)를 3타 차로 따돌렸고, 유소연과 렉시 톰슨(미국) 등 공동 2위 선수들도 2타 차로 제쳤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어려운 코스와 바람에 타수를 잃었으나 이정은은 나흘 내내 언더파 스코어를 적어낸 유일한 선수로 ‘메이저 퀸’에 등극했다. 우승상금은 역대 가장 많은 100만 달러(약 11억9000만원)다.

◆Q시리즈 수석 합격→데뷔시즌 ‘메이저 퀸’

이정은은 동명이인이 많아 자신의 이름 뒤에 숫자 ‘6’이 붙는다. 별명은 ‘핫식스’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를 평정하며 ‘대세’로 군림해 붙은 수식어다. 2016년 KLPGA 투어 신인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이정은은 2017년 대상과 상금, 다승, 평균타수 등 주요 4개 부문을 석권했고 베스트 플레이어, 인기상 등까지 싹쓸이하며 6관왕에 올랐다. 이정은이 “행운의 6”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핫식스’의 한 해였다. 2018년에도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상금왕과 평균타수상을 차지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미국 무대 도전이 기정사실화돼 있었지만, 정작 이정은은 망설였다. 장애가 있는 아버지, 어머니와 떨어져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도전을 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재능을 숨길 수 없었다. 지난해 경험을 쌓기 위해 연습 삼아 나간 LPGA 투어 퀄리파잉(Q) 시리즈에서 바로 수석 합격증을 받아버렸다. 이정은은 고심 끝에 올해 미국 진출을 선언했다. 그리고 데뷔 시즌 꾸준한 성적을 내며 우승권을 맴돌다 9번째 출전한 대회에서 선수로서 최고 명예인 US여자오픈 정상에 우뚝 섰다.
 

그린을 신중하게 살펴보는 이정은6. 그는 늘 옆으로 앉은 자세로 퍼팅라인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AP·연합뉴스]


◆늦깎이 골퍼의 꿈··· “레슨코치로 먹고살자”

이정은이 처음 골프를 시작한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하지만 취미로 3년간 골프를 배우다 그만뒀다. 골프 불모지에 가까운 전남 순천에서 그가 다시 본격적으로 골프채를 잡은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세계 최고의 골퍼가 목표가 아닌, 여성 레슨코치라도 되겠다는 각오였다. 단지 먹고살기 위해 골프채를 놓지 않는 ‘생계형’ 골퍼가 목적이었다. 절박한 환경은 그를 채찍질한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그는 2015년 국가대표에 발탁된 뒤 3부, 2부를 거쳐 1부 투어 출전권을 따냈고, 결국 국내 투어 무대를 평정했다.

이정은은 ‘독종’으로 불린다. 이정은은 4살 때 덤프트럭을 몰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된 아버지 이정호씨가 운전하는 장애인용 자동차를 타고 투어 생활을 했다. 아버지 이씨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물심양면으로 딸을 뒷바라지했고, 이정은은 골프장에서 휠체어에 탄 아버지를 밀어주며 라운드를 돌았다. 이정은의 효심은 지극하기로 소문났다. 돈을 많이 벌어 부모님을 편하게 모시겠다는 효심이 그의 근성을 깨웠고, 그를 독종으로 만들었다. 이정은이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샷을 할 수 있는 비결이다. 바람이 거셌던 US여자오픈 무대도 그를 흔들 수는 없었다.

◆박성현 잇는 엘리트 코스

US여자오픈은 특히 한국 선수들에게 특별하다. 한국 여자골프의 ‘대모’ 박세리가 IMF 금융 위기 시절인 1998년 ‘맨발 투혼’을 벌이며 우승을 이룬 바로 그 감동의 대회다. 이후 김주연(2005년), 박인비(2008·2013년), 지은희(2009년), 유소연(2011년), 최나연(2012년), 전인지(2015년), 박성현(2017년)이 정상에 올랐다. 이정은은 한국 선수로는 열번째 우승 트로피를 가져간 주인공이었다.

이정은은 US여자오픈을 제패한 한국 선수 가운데서도 전 세계랭킹 1위 박성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박성현은 이정은이 신인상을 받았던 2016년 국내 투어를 평정한 뒤 2017년 미국에 진출해 US여자오픈에서 첫 우승을 달성했다. 키 171㎝의 장신인 이정은이지만, 박성현과 플레이 스타일은 차이가 크다. 이정은은 폭발적인 장타를 앞세운 공격적인 성향은 아니다. 대신 드라이브, 아이언, 쇼트게임, 퍼트 등 모든 샷에 약점이 없는 안정적인 경기력이 최대 강점이다. US여자오픈 우승도 안정적인 경기운영과 침착함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이정은이 우승자 대열에 합류하며 올 시즌 LPGA 투어도 한국 선수들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한국 선수들은 시즌 7승을 합작했고, 지난 4월 첫 메이저 대회 ANA 인스퍼레이션에서 고진영이 우승한 데 이어 두 차례 메이저 대회를 모두 한국 선수들이 휩쓸었다. 이정은은 신인왕을 넘어 상금왕과 올해의 선수상까지 넘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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