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이 구상한 삼성고, 인재육성법 핵심은 '체력단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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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논설위원
입력 2019-05-1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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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재 칼럼-지금·여기·당신] 충남 아산 탕정의 현장에서 뜻밖의 비밀 발견


<이승재의 지금·여기·당신>은 우리 시대(지금) 삶의 현장(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당신)을 쓰고, 말하고, 만나는 칼럼입니다.

80~90년대 재계에는 ‘불굴의 현대, 관리의 삼성, 인화의 LG’라는 말이 있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도전정신을 상징하는 단어인 불굴은 ‘왕자의 난’으로 그룹이 아들 별로 갈라지며 힘을 다했다. 서로 화합하는 LG그룹의 인화(人和)는 구씨 가문 LG와 허씨 가문 GS그룹이 동업을 해지하며 ‘아름다운 이별’로 정리됐다. 그러나 삼성의 ‘관리’는 지금도 여전히 강력한 그룹의 통합기제다. 관리의 핵심은 인사, 노무다.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은 “나는 내 인생의 80%를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데 썼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삼성이 6년 전에 고등학교를 만들었다. 삼성전자 디스플레이의 ‘심장’ 충남 아산시 탕정면에 세운 충남삼성고(이하 삼성고)다. 성균관대학교와 중동고등학교는 삼성그룹이 이미 있는 학교의 재단을 인수, 중도에 맡은 학교(중동고는 현재 별개)지만 삼성고는 삼성이 설립한 첫 학교다. 과연 삼성고는 뭐가 다를까. 프랑스 유학파, 교육전문인 윤상민 기자와 함께 4월 30일 오후 충남 아산시 탕정면 충남삼성고를 찾았다.
 

[사진=충남삼성고 제공]

◆'초격차' 권오현이 그린 큰 그림
KTX 천안아산역 인근 탕정면 일대는 20여년 전만 해도 포도밭, 허허벌판이었다. 2003년부터 삼성그룹은 이 일대에 30조원을 투자, 삼성전자와 삼성디스플레이 등 4개 계열사 단지를 조성했고 현재 4만 여명의 직원들이 근무 중이다. 이 기업도시의 한쪽, 잔잔한 호수공원을 품고 충남삼성고가 자리하고 있다. 역에서 내린 지 차로 10분 만에 도착한 삼성고는 조용했다. 마침 이날은 1차 시험(중간고사) 마지막 날이라 교사, 학생들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소리 없이 취재하려 애썼다.

충남삼성학원 재단 임호순 상임이사는 삼성전자에서 25년 동안 인사 담당업무를 하다 2011년 재단설립 준비팀으로 파견된 삼성고 ‘산파’(産婆)이자 산 증인이다. 임 이사에 따르면 삼성고의 ‘큰 그림’은 재단 초대 이사장인 권오현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현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이 그렸다.

‘초격차’ 경영으로 삼성전자를 세계 1위 반도체 회사로 이끈 권 회장의 4대 핵심 키워드는 리더, 조직, 전략, 인재다. 이 모두 사람에 대한 얘기고 인사, 교육이 관련된 사안이다.

권 회장은 “학교 교육은 지금 당장의 성적보다는 미래 사회에 어떤 리더로 키울 것인가가 중요하다. 인성과 체덕지(體德智) 중심의 전인교육, 학생 중심 교육으로 미래 인재를 양성하자”고 강조했다.

◆삼성전자 인사팀, 학교에 가다
그 임무를 실행한 ‘에이스팀’은 삼성전자 인사부서 중심으로 꾸려졌다. 2011년 6월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은 임호순 인사 담당 상무에게 학교 설립 작업을 맡긴 거다.

임호순 상임이사는 삼성의 ‘인사통’이었던 자신이 학교설립 실무를 맡은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임 이사는 “25년 동안 삼성에서 인사업무를 맡으며 많은 젊은이들을 뽑고(채용), 훈련시키고(교육), 평가하고(인사고과), 성장시키는(승진) 일을 했다”면서 “하지만 이른바 좋은 대학을 나온 우수한 인재들이 시키는 일은 잘 하는데 도전과 모험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대학의 졸업장이나 스펙보다는 그 이전 원류(原流)의 단계부터 제대로 된 인재를 길러낼 수 없을까하는 고민과 갈증이 있었다”면서 “마침 권오현 회장께서 나에게 학교 설립의 중책을 맡겨 주셨다”고 설명했다.

임 이사는 이후 교육계의 ‘슈퍼스타’인 박하식 경기외고 교장을 ‘삼고초려(三顧草廬)’ 영입했고, ‘박-임’ 콤비는 한국에는 없는 새로운 개념의 고교를 만들고 있다.

◆삼성의 관리, 삼성고의 체력관리
삼성고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삼성의 고위 임원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귀족학교’라는 점이다. 이 오해는 이 학교의 입학전형 비율에 있다. 70%를 삼성 임직원 자녀로, 20%는 사회배려대상자, 10%만 일반전형으로 뽑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본사는 서울 강남에, 주요 사업장은 수원에, 삼성디스플레이 본사는 기흥에 있다. 삼성고에 다니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삼성디스플레이 공장 직원의 자녀들이다. 임 이사는 “임원 자녀가 1, 2명 있는데 누군지도 모른다. 우리 학교는 고위 임원 자녀들이 아니라 탕정에 근무하는 일반 직원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말했다.

직접 둘러본 삼성고의 시설은 어지간한 대학을 뛰어넘었다. 3층 규모의 도서관, 600명을 수용하는 기숙사는 물론 국제회의실, 각종 실험실, 음악실, 미술실까지 갖췄다. 무엇보다 삼성체육고등학교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체육관련 시설과 활동이 두드러졌다. 삼성의 관리가 삼성고에서는 체력관리로 특화됐다.

1학년 신입생들이 매일 하는 아침운동을 ‘모닝 스파크’라고 부른다. 이는 권오현 초대 이사장이 개교 당시 교직원들에게 ‘운동화 신은 뇌’(원제 SPARK. 운동이 뇌의 학습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쉽게 풀어쓴 책. 뇌 연구 권위자인 존 레이티 하버드대 교수 지음)라는 책에서 나왔다.

1학년 학생들은 1년 내내 시험일, 주말, 공휴일 등 특별한 날들을 제외하고는 매일 모닝스파크라는 아침 운동에 필수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아침 6시 20분에 기상, 체조와 달리기 등 기초운동을 하고 탁구, 농구, 라크로스 등 개별 자유종목까지 7시 20분까지 1시간 동안 이어진다.

삼성의 관리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부분은 MSMP(Miracle of Sixty-six days Melting Pot)라고 부르는 ‘66일, 기적의 용광로’ 프로그램이다. 신입생들은 2월 말일 입교부터 5월 초 MSMP 수료식까지 66일 동안 충남삼성고인이 되기 위한 적응 기간을 가진다. 기숙사 입소, 아침운동과 함께 가장 큰 특징은 휴대전화 없는 삶이다. 휴대폰은 아예 갖고 들어올 수 없고, 교내 도서관에서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모르는 게 있으면 교사에게 물어보거나, 도서관의 책과 자료를 직접 찾아봐야 한다. 졸업생들은 가장 힘들었던 것과 가장 좋았던 것으로 모두 이 MSMP를 꼽는다.
 

[사진=충남삼성고 제공]


◆재학생과 졸업생이 말하는 삼성고
"난치병 치료에 기여하고, 값싼 약을 보급하기 위해 의공학자가 돼 퇴행성 뇌질환 치료를 위한 약물전달 시스템을 개발하고 싶어요. 학교에서 한 다양한 활동이 의공학자라는 목표에 하나의 실에 꿰어지듯 엮이기 시작했습니다"(백여진 3학년)
"진로드림페스티벌을 통해 외교관을 꿈꾸게 됐어요. 자신의 진로를 찾아가는 과정인데요. 진로에 관한 책을 읽고, 가고 싶은 학과 정보와 진로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 등을 조사하며 진로 로드맵을 그려나가는 활동이에요"(서민주 2학년)
“국영수만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대학에 와서 잘 한다는 보장 없습니다. 충남삼성고를 거치면 대학에 와서 진정으로 잘 할 수 있는 인재가 됩니다” (서바울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전기전자통신공학부 19학번)
"충남삼성고에서의 3년이 살면서 하고 싶은 거 가장 실컷 해본 시기였습니다. 1인 1기 공연으로 뮤지컬도 해보고, 영화제작수업에서 다큐멘터리도 제작해보고, 동아리도 만들어서 운영해보고 말이죠. 심지어 제가 듣고 싶은 과목을 골라서 들을 수 있었어요"(김태영 서울대학교 아동가족학 17학번)
"단순히 대학 입시를 위한 교육보다는 학생 개개인의 특색을 살리고 학생들이 자신의 진정한 꿈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점은 분명히 다른 고등학교들과는 차별화되는 충남삼성고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을 넘어(Beyond the university)라는 말처럼 대학 입시를 위한 교육뿐 아니라 학생들의 진로 탐색과 결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김시환 DGIST 융복합대학 기초학부 19학번)

삼성고는 매년 교사들을 대상으로 독특한 대회를 연다. '학생이름 외우기 대회'인데, 학생 사진을 보면서 이름을 맞히는 게임이다. 굉장히 헷갈리는 얼굴과 이름을 선별해서 문제를 내는데, 거액의 상금도 상금이지만 교사들은 전교생 이름을 외우면서 학생 한명 한명을 '꽃'으로 여긴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처럼 학생들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은 한 송이 꽃이 된다. 삼성이 세운 학교에 '관리의 삼성'과 '불굴의 현대', '인화의 LG'가 고루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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