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 100주년] "그들에게 배워라"…김구·홍진·김붕준 3人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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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주 기자
입력 2019-04-1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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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역사적 날인 만큼, 일제 치하에서 조국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를 한번 더 가슴 깊이 새겨볼 때다.

특히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평화의 길을 모색하는 지금,  임시정부 요인들로부터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족의 수난기에 임시정부를 일구고 지켜내며 독립을 끌어낸 김구 선생, 홍진 선생, 김붕준 선생 등 3인의 리더십을 재조명한다. 
 

백범 김구 선생. [연합뉴스]

◆"'임정의 문지기' 맡겠다"…백범 김구 선생의 '솔선수범'형 리더십  

김구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 등과 더불어 임시정부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 중 한명이다. 그는 강한 카리스마와 더불어 곧은 심지를 보여준 임정의 지도자로 꼽힌다. 

독립에 대해 강렬한 열망을 지닌 김구 선생은 20세 젊은 나이에 국모 시해 사건에 격노해 일본인을 살해할 정도로 '무장투쟁론'을 추구한 열혈혁명가다. 

임정 수립 초창기에 초대 내무총장인 안창호 선생에게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수립 초기인 1919년 경무국장에서 시작해 1922년 내무총장, 1926년 국무령, 그리고 1940년에는 주석직을 수행하면서 어려운 시기에 임시정부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임시정부에서도 ‘애국단’을 결성해 친일파와 일본 주요 인사에 대한 암살 활동을 주도했고, 독립군 창설 등 임시정부의 무력 증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홍진 선생 [국회 제공]

◆임시정부의 시작과 끝 지킨 홍진 선생

독립운동가 홍진 선생은 일반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은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법무총장과 외무총장,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장, 6대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집념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대한제국의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그는 법적인 분야에서의 독립 운동에 힘썼다.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의 처음과 끝을 지키며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홍진 선생은 임시정부 수립의 토대가 된 한성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그는 김구 선생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만들어 광복군 창설의 토대를 쌓기도 했다. 한국독립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를 중심으로 결성한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이다. 

홍진 선생은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 의회인 임시의정원의 마지막 의장을 지냈다. 좌우익 세력이 통일 의회를 꾸렸던 때였다. 당시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이었다.

9일 국회의장실에 따르면 전날 홍진 임시의정원 의장의 손자며느리인 홍창휴 여사는 문희상 국회의장에게 임시의정원 관련 기록물 등 14점을 기증했다.

가장 눈에 띄는 기증물은 임시의정원 관인이다. 임시의정원 관인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상해에 만들어진 이후 1945년까지 26년여 동안 사용한 국새다. 유품에는 홍진 선생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서거 당시 보냈던 조전문(弔電文), 임시의정원 제35차 회의 소집공고문 등의 문서 등이 포함됐다.

국회에서는 10일 오전 10시 국회의사당 중앙홀과 국회도서관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을 열고 '홍진 선생 흉상 제막식'을 진행할 계획이다. 
 

김붕준 선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붕준 선생, 좌우 대통합 시도…화합의 리더십

김붕준 선생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발자취에 선생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독립운동에 가담한 인물이지만, 납북돼 사망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남북 간 대화와 협력 체계가 갖춰지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되면서 민족유일당을 통해 좌우합작을 추진했던 그의 리더십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19년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그는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임시정부에서 군무부 서기를 시작으로 군무부 참사·교통부 참사·국무원 비서장 등을 역임했으며 1939년 18대 임시의정원 의장, 1944년 국무위원으로 활동했다.

김붕준 선생은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위해 1941년 임시의정원 의장의 권한으로 좌파인 조선민족혁명당 세력을 등원시켜 좌우합작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좌우합작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 이듬해인 1942년경 조선민족혁명당을 임시의정원에 참여시키는 데 성공하는 등 분열된 독립운동계를 통합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임시정부 기록사진에 등장하는 태극기는 김붕준, 노영재 부부가 바느질로 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붕준 선생의 집안은 부인인 노영재를 비롯, 장남(김덕목), 큰딸과 사위(김효숙과 송면수), 둘째 딸과 사위(김정숙과 고시복) 등 7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로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 가문이다.
 
해방 후 김붕준 선생은 신탁통치반대운동·남북협상 참석·남북 총선거 주장 등 통일민족국가 건설에 노력했으나, 1950년 6·25 전쟁 중 납북돼 9월 28일 사망하면서 염원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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