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근의 차이나 무비⑯] 권력 관계의 정치적 알레고리 담은 영화 ‘홍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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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근 한국외대 교수·문화콘텐츠비평가
입력 2019-01-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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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세대’ 감독 장이머우 초기 대표작…개혁·개방 이후 中 뉴웨이브 주도

  • ‘매매혼’ 주제로 동양적 아포리즘 표현…‘출산’ 통한 봉건적 가치 전승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중국 북부 지역의 전통가옥, 사합원. 시집 온 쑹렌이 서 있다. [사진=임대근 교수 제공]


1920년대 중국. 서양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매매혼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 대학을 다니던 쑹렌(頌蓮)은 돈에 눈먼 계모에 의해 천(陳)씨 집안 넷째 부인으로 팔려간다. 천씨 집안 부인들은 거대한 중국 전통가옥, 사합원(四合院)의 폐쇄된 구조 안에서 살아간다.

사방을 둘러싼 잿빛 담장을 말없이 굽어보는 카메라는 마치 그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는 듯, 그러나 아무런 말이 없다. 틀어 막힌 담벼락 안에서 최고 권력은 천 대감에게 집중돼 있다. 누구도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영화는 줄곧 최고 권력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지 않는다. 가끔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한한 힘의 신비감을 더한다.

영화는 ‘5세대’ 감독들의 촬영을 도맡으며 영화계에 입문한 장이머우(張藝謀)의 초기 대표작이다. 1987년 감독 데뷔작 ‘붉은 수수밭(紅高梁)’을 통해 동시대 중국영화를 화려하게 물들인 그는 ‘국두(菊豆, 1991)’와 ‘홍등(大紅燈籠高高掛, 1992)’을 통해 여성 문제를 다루면서 개혁·개방 이후 중국영화의 뉴웨이브를 주도했다.

이제는 중국의 문화 권력으로 우뚝 서서 본격 상업영화로 방향을 틀었고, 권력 지향적 이데올로기를 관철하려는 시도를 거듭하고 있지만, 그의 초기 영화들은 전대미문의 중국영화로서 유감없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중국 북부 지역의 전통가옥, 사합원[사진=임대근 교수 제공]


홍등이 방문 앞에 높이 걸려 불을 밝히는 날, 그 주인공만이 ‘대감 어른’을 모실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대감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네 부인의 질투와 투쟁은 이미 오랜 일이 됐다.

여성으로서 매력을 잃어버린 듯, 늙고 살찐 첫째 부인은 명목상 정실일 뿐이다. 둘째 부인은 교활하기 그지없다. 쑹렌을 위하는 척 이것저것 잘 챙겨준다. 하지만 감언이설일 뿐, 언제나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있다. 이름난 여배우이자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셋째 부인은 그만큼 욕정도 많다. 여러 부인을 두고 있는 대감의 사랑에 성이 차지 않는 그녀는 가문 주치의인 가오(高)와 눈이 맞아 사통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머지않아 둘째 부인에게 발각되고, 결국 누각 위의 작은 골방에서 죽임을 당한다.

잿빛으로 둘러싸인 집 안에 붉은 등불이 달리면, 감독 특유의 색채 대비를 통한 미학적 효과가 창출된다. 점등과 봉등, 대감을 맞이하기 위한 발안마 등은 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체제 내부의 의식(儀式)을 보여준다. 이런 미장센들은 미학적 효과뿐 아니라, 바로 그 동양적 의식의 아포리즘으로 작동한다.
 

매매혼으로 팔려와 발안마를 받고 있는 쑹렌. [사진=임대근 교수 제공]


쑹렌은 다른 부인들의 시샘과 질투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간다. 그러나 대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그녀는 결국 거짓 임신을 계획한다. 대감의 기쁨도 잠깐, 쑹렌의 거짓은 계집종에게 발각된다. 둘째 부인과 대감까지도 진실을 알게 된다. 대감은 ‘봉등’의 징벌을 내린다.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미쳐버리고 만다. 이듬해, 천 대감 집에는 젊고 아름다운 다섯째 부인이 새로 들어온다.

바깥 세계와 단절된 내부에서 권력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은, 현존 권력을 이용해 스스로 권력화하기를 꿈꾼다. 마지막 서열로 들어온 쑹렌의 생존 방식, 즉 기존의 권력들을 전복하면서 형식적 권력관계를 실제적 권력의 획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최고 권력과 철저히 결탁하는 것이다.

그 결탁의 끈을 가장 공고하게 이어주는 해결책은 ‘출산’을 통한 봉건적 가치의 전승이었다. 쑹렌은 자신도 시간이 가면 첫째 부인처럼 늙고 뚱뚱해지리라는 사실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간의 배신을 보상받을 길은 대를 잇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권력을 세습하는 것이었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중국 북부 지역의 전통가옥, 사합원. [사진=임대근 교수 제공]


질투와 음모, 비밀과 폭로의 정치가 계속되는 동안 천 대감의 사합원은 중국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 영화는 절대 권력의 통치 아래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채 살아가야 했던 중국인의 삶 속에서 내부 투쟁은 자칫하면 모두를 공멸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매우 우화적이다. 전통 법도의 전승과 새로운 창신 가운데 혼란스러운 중국 사회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쑹렌의 발광(發狂)은 현존 질서에 철저히 동화됐으나, 이를 자신의 방식으로 ‘우롱’하고자 했던 젊은 세대의 실패라는 점에서 곱씹을 만한 의미가 있다. 결국, 거대한 저택은 말없이 유지되고 예의 현존 질서만이 작동된다. 죽거나 미침으로써 체제 내에서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한 자는 셋째 부인과 쑹렌뿐이다.

셋째 부인은 권력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탈하기 위한 꿈을 꾸었던 재기발랄한 인물이다. 쑹렌은 전통 방식을 있는 그대로 승인하지 못하고 자신의 방식으로 개화(改化)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이들은 체제 내에서 승인되지 못한 채, 파멸되거나 처벌받는다.

영화는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의 비극적 말로를 통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권력의 의지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킨다. 그러므로 영화가 단지 1920년대 여성의 비인간적 삶의 양태를 그렸다는 방식으로만 독해될 일은 아니다. 물론 감독 장이머우의 초기작들이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다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표층적 층위로만 해석될 필요는 없다. 정치적 알레고리의 가능성이 거기에 있다.
 

[임대근 교수의 차이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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