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게 거북한 ‘일본당’ 조선의 이익만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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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기자
입력 2019-01-2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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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⑪ 갑오(甲午) 전야(前夜)

[청일전쟁 직전, 프랑스신문에 실린 삽화.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먹잇감 신세로 전락한 조선의 처지를 묘사한 그림이다.]




민씨들은 동농을 여주목사로 보낼 때는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안동으로 쫓아내면서 주일공사 자리에서도 밀어냈다. 하지만 대신할 사람이 없다. 안동대도호부사로 발령이 난 두 달 뒤, 그는 다시 주일공사를 겸대(兼帶) 하게 되었다. 지방관으로 재임하는 기간에도, 동농은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들어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려 동분서주했다.
동농이 ‘반청(反淸)’ 노선의 선봉에 선 것은, 병자호란 때 순절(殉節)한 김상용(金尙容)이 그의 직계 조상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주 자연스럽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도 안동 김씨였다. 왕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데다 가문의 유지(遺志)를 이어받는다는 자부심에, 동농으로서는 임무 수행에 거리낌이 없었으리라.
고종이 일본에 이어 미국에까지 공사관을 설치하려 하자, 청나라는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朴定陽)의 부임을 막았다. 자기네들과 사전에 상의하지 않았다는 거다. 협상 끝에, 조정은 위안스카이에게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첫째, 조선공사는 주재국에 도착하면 먼저 청국공사를 찾아가 그의 안내로 주재국 외무성을 방문한다. 둘째, 조선공사는 회의나 연회 참석 시 청국공사 밑의 자리(末席)에 앉는다. 이것이 영약삼단(另約三端)이다.
동농은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청국공사 리징방(李經芳)에게 영약삼단의 취소를 요구했다. 평양 개방을 반대하는 위안스카이의 모략에 맞서, 인천과 황해도 철도(鐵島) 간 선박 왕래를 보장하는 조약 체결을 시도했고, 오스트리아와 비밀리에 수교협상을 추진했다. 이 모든 일은 고종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당초, 조선더러 열강에게 문을 열도록 권유한 쪽은 청나라였다.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억지(抑止)하는 역할을 혼자 감당하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리훙장(李鴻章)은 조정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적 야욕을 가장 잘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은 조선이 서양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는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바 있다(매킨지, 신복룡 역,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재인용). 그런데, 조선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위안스카이의 야심과 권세를 놓지 않으려는 민씨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상황은 점점 더 나쁘게 흘러갔다.

◆함께 어울리되, 동화되지 않는다

조정 안팎에서, 동농은 고종의 측근이 된 직후에는 ‘러시아당’, 주일공사로 부임한 뒤부터는 ‘일본당’으로 불렸다. 그렇다면, 그는 마음속까지 ‘일본당’이었을까? 아니다. 이완용처럼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만을 좇는 철두철미한 기회주의자가 아닌 이상(이완용의 매국 노선은 친미-친러-친일의 순서로 변신하며 마각을 드러냈다), 초심(初心)이란 갈대가 흔들리듯 그리 허약하지 않다.
동농은 고종 17년(1880)에 지은 시(詩)에서, “일본 함선이 제물포에 정박해 사악한 금수처럼 조선을 더럽히니 저들의 수호(修好) 요구가 결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다”라고, 비분강개한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신동준, <한국사 인물 탐험>에서 재인용). 그는 청나라와 일본을 비교하며, 어느 쪽과 손잡는 게 조선에 더 유리할지 궁리했을 따름이다. 일본과 친해지는 건 수단이고, 열강의 견제를 끌어내 청나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목적이다.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와 이른바 ‘동양 3국 연대론’을 논하는 자리에서, 아오키가 조선의 어정쩡한 자세를 비난하자, 동농은 이렇게 반박했다. “아시아에서 조선은 정(鼎, 세발솥)의 한쪽 발과 같다. 만일 솥에 발 하나가 빠지면 두 발이 있을지라도 이내 솥은 넘어가고 만다. 오히려 귀국과 청국이 이를 이해해 주면 조선의 독립은 어렵지 않다.”(신동준, <한국사 인물 탐험>에서 재인용) 제 발로 걸어가 앞잡이 노릇을 자처한 송병준이나 이용구와는 달리, 그는 일본에 거북한 존재였다.
동농은 독립협회와 건양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일본지사로부터 석유를 수입해 조선에 독점판매함으로써 폭리를 취하던 일본 상인들에게는 악몽이었을 게다. 동농은 이들의 로비로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되었고, 무혐의가 입증되어 곧 풀려났지만,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동농이 일본을 대하는 자세는 화이부동(和而不同), 바로 그것이었다.

◆일장춘몽으로 막을 내린 자주외교의 꿈

고종 30년(1893) 3월, 동농은 과만(瓜滿, 임기 만료)으로 안동대도호부사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주일공사에서도 해임됐다. 이로써, 1886년 10월 청나라 톈진 주재 종사관에 임명된 이후 7년에 걸친 그의 외교관 생활은 끝이 났고, 자주외교의 꿈 또한 일장춘몽으로 막을 내렸다. 민씨들의 선택이었다.

“김가진이 주일공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은 민씨 척족세력의 압력 때문이었다. 김가진의 후임은 과거 김가진과 함께 통리아문 주사로 임명되었던 김사철이었다. 일본 신문에 따르면 민씨 세력의 일원인 김사철은 김가진이 주일공사가 된 것을 질투하여 왕비에게 중상하였다고 한다. 김가진이 ‘시세에 편승해서 민씨에게 화를 입힐 것이니 빨리 그를 퇴임시키지 않으면 후환이 미칠 것’이라고 중상하자 ‘왕비가 크게 놀라 국왕에게 중상하여 김가진을 파면, 귀국토록 하였다’는 것이다.”
(한홍구, <김가진 평전>)

임오군란으로부터 11년, 갑신정변으로부터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극동의 정세는 시시각각 조선에 불리해졌다. 수구당이 하늘처럼 믿고 떠받들던 청나라의 위세가 눈에 띄게 시들었다. 그와 반대로, 일본의 기세는 그들의 표현대로 욱일승천(旭日昇天) 솟아올랐다. 일본이 청나라와 싸울 힘을 갖춘다는 것은, 한반도를 두 나라의 전쟁터로 내어주고, 왕실은 승자의 볼모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어쩌면 조선을 구할 ‘골든타임’이었을 이 천금 같은 시간. 자주외교로 조선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키는 동안, 내정개혁으로 나라를 굳건히 지킬 역량을 배양해야 했다. 그것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진심으로 동정한 외국인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외척과 수구당이 정권을 장악한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의 마지막 10년, 극에 달한 가렴주구와 매관매직은 그 모든 기회를 걷어찼다.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동농은 한직(閑職)에 밀려나 있었다. 부호군(副護軍) 벼슬이 주어졌지만, 달리 재산이 없는 그에게 녹봉이라도 주기 위한 고종의 배려였다는 게 <동농 김가진전>의 저자 김위현 교수의 말이다.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 그리고 갑오경장. 우리 근대사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통한(痛恨)스러운 해로 기록될 갑오(甲午) 전야(前夜). 역사는 그에게 어떤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을까.
정리=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 (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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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대한민국 수립 원훈, 동농 독립유공자 서훈 받아야”
<김가진 평전>의 저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근현대사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김가진-김의한․정정화-김석동․김자동 가족 3대에 걸친 독립운동 역정을 다룬 <조국의 가는 길> 전시회(서울역사박물관․독립기념관 공동주최, 2013) 도록(圖錄)에, 동농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논고(論考)를 실은 바 있다. <김가진 평전>은 이 글의 문제의식을 바탕에 두고 집필되었다.

- 동농의 삶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대한제국의 대신으로서 독립을 위해 망명한 이는 김가진 한 사람뿐입니다. 74세의 나이에 자신을 내던져, 개화운동이 독립운동과 직결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압록강을 건넜기에 아드님 김의한 선생과 며느님 정정화 여사의 독립운동 길도 열린 겁니다.

- 동농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주재 외교관이었는데요.
당시 조선은 청(淸)의 속방(屬邦)이 아닌 독립자주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습니다. 김가진이 선 자리는 그 최전선이었습니다.

- 동농은 주일공사 시절 반청(反淸) 자주외교에 앞장서면서 한때 ‘일본당’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대표적인 ‘일본당’이었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거북한 존재였습니다. 그것은 동농이 일본으로부터 반대급부를 받는 친일파가 아니라 조선의 이익을 생각해 일본을 가까이하며 일본으로부터 배우려고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그를 자기들의 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동농은 석유직수입회사를 설립해 일본이 폭리를 취하는 걸 막으려다, 모함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 동농은 갑오개혁에서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갑오개혁의 추진기구인 군국기무처는 동농의 작품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의 행장(行狀)을 보면, “경회루에서 17주야를 불면불휴로 208조의 개혁안을 친자 기초하여 김홍집 내각으로 하여금 공포 시행케 하였던 것이 저 유명한 갑오경장이며 주창자가 선생이었다”고 나옵니다.

- 그가 역점을 두었던 개혁정책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조세개혁, 교육입국 등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특히 형법체계 근대화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동농은 법부대신 시절, 경찰은 체포된 범인을 24시간 이상 구금할 수 없으며 이를 넘길 때에는 반드시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훈시를 내립니다. 그는 우리 근대사에서 인권 수호의 효시였던 셈입니다.

- 독립문 현판은 동농이 썼나요?
동농은 독립협회 8명의 위원 중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린 분입니다. 그가 황해도관찰사를 할 때 먹으로 유명한 해주에서 ‘독립문 먹’을 만들어 전국에 보급했습니다. 독립문 현판 글씨는 동농이 썼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 동농은 말년에 대동단 총재를 맡고,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합류했습니다.
‘온건개혁파’를 대표하는 김가진이 말년에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의 망명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개화운동이라는 중요한 흐름이 어디로 이어졌으며, 누가 이어받았는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변수입니다. 개화파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동농이 임시정부에 합류함으로써, 개화운동의 큰 물줄기가 친일이 아니라 독립운동 쪽으로 흘러가도록 물꼬를 텄고, 제국의 귀족이 임시정부에 가담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까지도 동농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농은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망명을 하여 임시정부로 와 민국의 신민(新民)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는 일부에서 오해하듯이 시대착오적인 복벽을 꿈꾼 게 아니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넘어가는 제 길을 앞장서 달려간 대한민국 수립의 원훈입니다. 그런 그를 두고 작위를 받은 적이 있다고 서훈을 주저하는 것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일입니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 명의의 신임장을 갖고 군자금 마련 등 활동을 한 공로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분이 70분이 넘는데, 동농 선생이 서훈이 안 되어 해외에 쓸쓸히 묻혀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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