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에게 孝는 무엇이었나

류은혜 기자입력 : 2019-01-17 15:29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⑤서른살 아들, 손가락 깨물어 병상의 부친에게 피를 바치다
 

동농의 부친은 안동 김씨로 종1품을 추증받았다. 사진은 안동향교.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어릴 적 시간은 느리게 간다. 어른의 눈에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것처럼 비치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이는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는지 불만이다. 어른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계절이 몇 번 바뀌어도 제자리를 맴도는 것만 같아, 자기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의 키가 아버지와 비슷해진 걸 발견한다. 그때부터 시간은 쏜살처럼 빨리 간다.
동농에게, 신동(神童)이라고 불린 시간은 일생 전체를 놓고 보면 10분의 1도 못 될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사모관대(紗帽冠帶)하고 등청(登廳)하는 아버지를 배웅하는 어린 아들에게, 시간이란 늑장만 부리는 미운 상대였다. 학문의 성취는 충실감을 주었으나, 그 시절은 덧없이 아련한 지난날이 되었고, 가진의 이십대는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다. 공자께서는 이립(而立)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작년 말부터 아버님 병환이 심상치 않았다. 형 영진, 양자로 들어온 동생 화진, 출가한 누이들까지 모였다. 칠순을 넘긴 분이라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아득하다. 아버님, 일어나세요. 소자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가진은 손가락을 깨물고 피를 내어,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 드렸다. 풀리던 동공(瞳孔)이 일순 모이며 가진에게 가닿는가 싶더니,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고종 12년(1875) 4월 28일. 동농 나이 서른 살의 일이었다.
상청(喪廳)의 주인은 양자 화진이다. 가진은 풍수를 데리고 광주(廣州) 선영으로 내달렸다. 오른쪽 기슭 나지막한 곳에 모실 만한 자리가 눈에 띄었다. 풍수는 자신보다 빠른 젊은 상주의 눈썰미에 민망해하면서, 나침반을 거둬들였다.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삼우(三虞)까지 지내고 나자, 가진은 탈진했다. 사흘 밤낮을 잤다. 꿈을 꾸었다. 아버지다. 가진이 어릴 적, 늦둥이 둘째에게 글을 가르쳐 주시던 그 모습이셨다.

“가진아, 늦었다고 조급하게 여기지 말아라!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있지 않으냐? 좀 더 기다려 보아라. 모든 것은 수(數)가 있느니라.”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113)


아버지는 가진에게 피를 나누어주고, 배움을 물려주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피를 넘어 문(文)으로 연결된 관계였다. 첫 번째 스승, 아버지. 세간에서 으뜸이라고 쳐주는 동농의 글씨 역시 아버지의 가르침이 키웠다. 가진은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또 만났다.

“이제는 <대학(大學)>을 배워야 한다. 그럼 시작할까? 자, 어려운 글자를 찾아보아라. 글자는 모두 알겠지? 그럼 읽고 뜻을 새겨야지. 그리고 체본(體本, 보고 따라 쓰라고 스승이 써준 글씨)을 받아서 쓰도록 하여라.”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32)


“재주만 믿고 게을리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글씨 연습이 중요하다. 우리 일족은 모두가 명필 소리를 들어왔다. 너도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으니 하루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내가 한가한 지방관으로 나와 있으니 너에게는 더 없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느냐?”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36)


그러나 아버지는 가진에게 신분의 굴레를 씌웠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겠으나, 그는 아들이 평생 지고 살아야 할 업(業)에 무심했다. 아버지는 생명을 베푼 은인이자 고마운 스승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다. 한때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아니 될 일이다. 수마(睡魔)에서 깨어난 가진은 벌떡 일어나 고쳐 앉았다.
조선은 자나 깨나 효(孝)를 부르짖었다. 인간의 당연한 도리를 이렇듯 집요하게 환기(喚起)시켜야 했을 정도로 조선의 백성은 금수만도 못한 존재였을까. 인정(人情)은 콩알 한 알이나마 나누는 사이에서 싹트는 법이다. 효(孝)는 통치이념이었을 따름이다.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상록수>의 심훈(沈熏)이 왜놈의 옥에 갇힌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올린 맥락을 더듬어야 한다.
조선의 양반들이 최고로 꼽은 가치는, 지금 우리가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충(忠)이 아니었다. 이는 조선을 쥐락펴락했던 사림(士林)에게 바쳐진 시호(諡號)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조광조 문정(文正), 이언적 문원(文元), 김장생 문원(文元), 김상헌 문정(文正), 송시열 문정(文正), 김육 문정(文貞)…. 정조를 도와 왕권 강화에 힘을 쓴 남인(南人) 채제공조차도 문숙(文肅)의 시호를 받았다.
얕잡아보던 무관들에게는 충(忠) 자(字) 시호를 주고, 왕이 어떤 마음일지 아랑곳없이, 자기들끼리 문(文) 자(字) 돌림 시호를 대물림하며 나눠 가졌던 사대부들. 그들에게는 유명조선국왕(有明朝鮮國王)의 신하 자리보다 문성왕(文聖王) 공자의 후계 자리가 먼저였다. 아버지와 문(文)으로 이어졌으되 그 문(文)으로 출세할 길이 막힌 가진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세계사의 시계는 19세기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건만, 민국(民國)이란 아직은 동농에게는 머나먼 나라였던 것이다.

* 이 연재는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을 저본(底本)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정리 = 최석우 <독립정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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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농의 어머니가 요양하던 안동 천등산 봉정사. [사진=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여덟살 소년, 모친 옆자리 위해 사흘 단식
- 봉정사 뒷산 명당에 묻힌 어머니

안동부사를 제수받은 아버지를 졸라, 가진은 어머니와 함께 가문의 본향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만, 평소 몸이 약했던 어머니가 몸져 눕게 되었다. 어머니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안동 뒤편 천등산 봉정사(鳳停寺)에서 요양을 취하게 되었고, 가진은 안동 관아와 봉정사를 오가며 글공부와 어머니 병간호를 병행했다. 하지만, 가진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어머니의 장례를 앞두고, 가진은 봉정사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말을 떠올렸다. “명당이야, 저 뒷산 속등이 대터지. 거기가 화심혈(花心穴)이야. 절 땅이 아니었으면, 벌써 누군가가 차지했겠지.” 가진은 어머니를 그 명당에 모시기로 결심했다. 대웅전 앞에서 단식하기를 사흘. 쓰러진 가진의 효심에 감동한 주지 스님은 땅을 허락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지관(地官)이 묘자리를 보더니 혀를 찼다. “서울 사는 어린 상주가 어떻게 이 자리를 알고 있었으며, 또 어떻게 땅을 얻어낼 수 있단 말이오. 이 자리는 당대에 족히 이상(二相, 삼정승 다음 가는 벼슬자리)이 나올 자리요.” 그때가 동농이 우리 나이로 여덟살 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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