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국민적 소양으로서의 대북정책 – DJ가 살아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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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입력 2018-10-1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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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대북정책 논의가 국민적 유희(national pastime) 수준으로 보편화된 건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영향이 크다. 그가 ‘햇볕정책’이란 쉽고도 기발한 말을 만들어 누구라도 이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외투를 벗기는 건 강풍이 아니라 햇볕이라니, 이보다 쉽고 명쾌할 수 없었다. ‘햇볕’을 지지하느냐, 안 하느냐, 내 입장만 있으면 누구와도 논쟁이 됐다. 대북정책이 이솝우화에 얹혀 불현듯 우리의 일상(日常)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DJ가 ‘햇볕’이란 말로 포용정책 지지자와 회의론자들 간의 갈등을 실제 이상으로 심화시켰지만 대북정책 논의의 대중화(大衆化)를 이뤄낸 건 부인하기 어렵다. 나는 이게 햇볕정책의 가장 의미 있는 성과라고 본다. DJ의 입장에선 더 그럴 것이다. 대북 논의의 대중화는 지지층의 확산과 정체성의 공고화로 이어져 노무현·문재인 정권의 기반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 DJ가 살아서 지금 이 정권의 대북정책을 본다면 어떤 충고를 할까.

나는 한때 대북정책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3C 모델’을 제시한 적이 있다. 대북정책이 성공하려면 남북 간에는 신뢰(Confidence)가, 우리 내부에선 합의(Consensus)가, 그리고 주변 국가, 특히 미국과는 정책적 양립성(Compatibility), 곧 3C가 있어야 한다는 초보적인 분석의 틀을 만들어 본 것이다. 대북정책의 성패(효율성)를 결정하는 변수가 어디 한 둘이겠는가 마는 그걸 다 열거하기보다는 이 셋으로 좁혀보자는 의도에서였다.

DJ의 햇볕정책이 집권(1998년 2월~2003년 2월) 중 가장 성공적이었던 때는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전후다. 북한(김정일)과의 ‘신뢰’도 비교적 좋았고, 우리 사회 내부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합의’도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역시 미 클린턴 정부와의 ‘양립성’이었다. 클린턴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과 햇볕정책은 그 지향점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했고 유기적인 협조체제도 유지했다.

이런 ‘양립성’은 조지 W 부시 정권의 등장으로 무너졌다. 2001년 2월 취임한 부시 대통령은 이른바 ABC(Anything But Clinton-클린턴 것만 아니면 다 좋다)의 기조 위에서 대북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했다.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잔류시켰고, ‘악의 축(Axis of Evile)’이라고 불렀다. ‘양립성’이 훼손되면서 남북 간 ‘신뢰’도, 우리 내부의 ‘합의’도 흔들렸다. 햇볕정책이 설 자리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졸저, '사회통합형 대북정책', 2013년).

그만큼 ‘양립성’은 중요했다. 진보의 원조 격이자, 첫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DJ는 이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는 대화를 추구하면서도 항상 안보(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했다. 요즘 진보진영 인사들은 이마저도 ‘중도적 보수주의자’로서의 DJ의 한계라고 여길지 모르나, DJ는 탈냉전의 바람이 거세지만 동북아와 한반도라는 특수한 질서 속에선 아직은 ‘구조의 힘’이 더 강하다고 믿었던 현실주의자였다.

DJ는 취임 초 대북 3대 원칙을 천명하면서도 ‘무력도발 불용’을 ‘흡수통일 배제’, ‘화해·협력 추구’보다 앞에 뒀다. 햇볕정책을 얘기할 때도 안보와 자주국방,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맨 먼저 강조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 기초 위에서 평양 정상회담은 고위급 군사회담으로 이어졌고, 북한군 실세(인민군 총정치국장)가 백악관을 예방하고 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는, 당시로서는 기적 같은 일들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DJ에게도 이 정부는 몹시 서두르는 걸로 비칠 거라고 나는 믿는다. DJ라면 신중함과 절제를 당부했을 게 분명하다. ‘분위기’가 좋다고 가진 걸 다 보여주거나 주겠다고 약속하지 말 것, 어떠한 합의도 미국과 더불어 이행 여부를 확인한 후 상응조치를 취하라고 주문했을 것이다. DJ조차도 6·15 정상회담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이제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2년 뒤 제2차 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을 겪지 않았던가. 2002년 10월 제2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자 이듬해 1월 임동원을 특사로 보냈으나 김정일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DJ는 정부의 거듭된 해명에도 불구하고 터져 나오는 한·미 간 불협화음에 대해서도 언짢아했을 것이다. ‘5·24 조치 해제 검토 방침’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우리의 승인 없이···” 운운은 그에게 심한 모멸감을 주었겠지만 그런 상황을 자초한 원인에 대한 성찰이 더 중요함을 알았을 것이다. 가장 자주적(自主的)이라는 정부에서 이처럼 비(非)자주적인 굴욕과 혼선이 잦다면 아이러니다. 외신은 문 대통령을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이 정부가 서두르는 까닭은 임기 내에 뭔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조급증에다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 탓으로 읽힌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평양에서 ‘우리가 정권을 뺏겼기 때문에 남북관계가 단절됐다. 앞으로 정권을 뺏기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나, ‘진보가 20년은 집권해야 한다’, ‘보수를 궤멸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대해서도 DJ는 심하게 질책했을 것이다. 수습할 능력도 없이 판만 깨고 다니는 걸 못 참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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