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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인터뷰]독립투쟁처럼 '자주경영 시스템'을 꿈꿨습니다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18-10-11 18:09수정 : 2018-10-11 18:31
이상국의 인물탐구 - 창사20주년 맞은 오토 김선현회장의 '여성 기업경영 성인식'

김선현 오토 회장 인터뷰[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스무 살이 된다는 것은, 기업에게도 성인식(成人式) 못잖은 감회다. IMF위기 때 부도난 회사를 맡아 시작한 자동차 부품사. 10년 뒤 혹독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자라나 재작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던 기업이라면 2018년 10월 13일의 창사20주년 감회가 여간하지 않으리라. 그것을 일군 리더가 여성경영자이고, 또한 창사 이전에 노조위원장으로 단식농성을 벌인 기억을 지닌 사람이라면, 스무 해의 별빛은 촘촘한 기억으로 채워져 있음에 틀림없다. 

자동차용 변속기를 만드는 세계적인 기술력을 지닌 기업,오토인터스트리(경주), 네오오트(예산), 모토(울산), 오토비나(베트남 법인)으로 구성된 오토그룹 얘기다. 그리고 그 그룹을 이끄는, 독립운동가 정정화 여사의 손녀 김선현 오토회장의 얘기이기도 하다. 처음에 말을 걸면 마음을 착 가라앉게 하는 단정한 말씨이지만, 조금 대화를 나누다 보면 가슴에서 잉걸불이 일어나는 듯한 열정이 훅 끼치는 듯하다. 직원들 먹여 살리기도 바쁜 경영이라지만, 그녀의 경영에는 '가문의 기운'같은 인간주의가 배어있다. 조근조근 그 논리를 쫓다 보면, 광야에서 독립운동하던 그 자유와 자율의 열망이 경영일선으로 이동한 것 같은 착시가 살짝 온다. 갑자기 차가워진 가을바람 속에서 그를 만났다.

먼저 노조위원장 시절의 단식 얘기부터 꺼냈다. 이 기억이 아마도 그의 경영을 이루는 의식의 근간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82년 미국계 은행에 들어갔는데,  4년반 근무하니 은행이 철수했죠. 그래서 호주계인 웨스트팩 은행에 들어갔습니다. 1987년과 1988년엔 노동조합이 많이 생기던 시기였는데, 웨스트팩에도 노조가 만들어졌어요. 특별한 의지를 지닌 건 아니었는데, 노조 결성 뒤에 회사의 대응이 워낙 과민해서 상황이 나빠졌죠. 저는 당시 타사에서 노조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던 언니와 형부가 있어서, 여러 가지로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러다가 노조활동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는 쪽이 되었고, 나중엔 노조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은행은 노조와의 대면을 아예 기피하는 쪽이라, 본사와 담판을 지으려 호주까지 가게 됐죠. 거기서 열흘을 목표로 단식까지 하게 됐습니다. 우린 겨울이었는데 거긴 한여름이더군요. 영상 40도까지 올라가는 날씨에 일주일 하니 혈압이 너무 떨어져 이대로 가면 죽을 수 있다고, 우리를 봐주던 교민 의사가 말했습니다."

이런 투쟁은 회사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래서 단식을 풀고 그는 귀국행 비행기를 탔다. 바로 그때 이 은행은 '합의'를 없던 일로 해버렸다. 돌아오자 지점장은 "모든 것은 0이다, 합의된 것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이후 단체협약을 대폭 양보하고 파업을 마무리한다. 2년뒤 웨스트팩 은행은 부동산파동으로 10개 지점을 폐쇄하는 상황에 이르고 한국의 은행도 문을 닫았다. 김회장은 그때 회사를 나왔다.

이제 창업즈음의 질문으로 들어갔다. 1998년 자동차 부품사업을 하게 되셨는데...

"은행을 그만 두고 1995년에 섬유기계를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는 무역회사를 차렸죠. 중국이란 고객은 계약을 너무 안지켰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으로 고객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IMF관리를 받는 사태가 찾아왔죠. 자동차 협력사들이 부도가 많이 났는데 현대차에서 이 부도업체를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부친(김자동)에게 100여명 직원들이 오갈데 없다며 한 회사를 도와달라는 요청이 있었죠. 정세영 회장은 부친과 고등학교 때 절친이었습니다. 정회장의 결혼 신부감을 저희 할머니(정정화)에게 인사시켰을 정도로, 그분은 독립운동을 하신 분에 대해 존경심이 있었죠. 그런 사이였고 또 직원들이 딱했기에 부친은 팔을 걷었을 겁니다."

1998년 동생인 김준현사장이 오토를 맡았는데, 현대차에 제때 납품을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누나인 김선현에게 SOS를 보냈다. 그때의 일.

"당시 오토는 차변속기 부품과 부트밴드를 생산했죠. 숙련공이 생산했던 부트밴드는 흑자였는데 변속기는 적자였죠. 그런데 부트밴드 쪽 직원들이 우리가 왜 적자인 저쪽을 먹여살리느냐며 분사를 요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석달 동안 제가 직접 새벽까지 공장에서 직접 전기용접을 하며 부품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이후 현대차의 제품테스트를 통과했습니다. 이후 여자라고 무시하던 직원들이 달라졌어요. 그때 현대차 담당이사가 하던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맨땅에 헤딩한다고 다 되는 줄 아느냐?' 그러나 우린 해냈죠. 이 일로 리더십에 대해서 눈을 뜬 것 같아요."

노조위원장을 지내던 사람이 경영자가 되어 노조를 대면했을 때의 고뇌가 없을 수 없었으리라. 그걸 물어보았다.

"노조가 두번 생겼죠. 처음엔 2002년, 그리고 2015년. 노사발전협의회를 만들어 해소한 경우도 있었고, 좀 어렵게 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자율경영시스템을 예산에서 먼저 도입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경주에선 소통이 없어 공연히 오해하고 불안해했던 것 같습니다. 비정규직을 많이 만들려고 한다는 의심 때문이었죠. 당시 노조의 ㄴ 자도 꺼내지 말라 했던 건, 간부들이 저마다 나서서 대화를 함으로써 오해를 더 키울까 걱정해서였죠. 우선 소통창구를 '나' 한명으로 단일화해서 하려고 했던 것이죠. 노조와의 대치가 길어졌던 건 민노총과 합세하면서 소통하는 일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당시의 '비판 기사'들이 인터넷을 떠돌고 있지만, 현재는 다 해결되고 갈등도 사라진 상태입니다."

이번엔 김회장이 경영 중에 가장 잘한 일이라고 꼽고 있는 '사원주주형 자주경영제도'를 물어보았다.

"직원들이 100명을 넘어서면 관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전 사원들과 경영자가 직접 소통할 수 있을 때 모두가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예산과 베트남으로 확장을 하다보니, 팀장들이 늘어나고 저의 생각이 잘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관료주의 같은 것이 생겨나더군요. 그래서 좀 다른 체제로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을 활용하되, 20-40명 정도의 주식회사 형태로 분사하는 것입니다. 현장라인도 분사하여 한개의 회사가 되며, 서로 내부 협동을 해서 수익을 내면 분배를 하는 제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제도로 인해 그룹이 이익을 거두지 않는 정신입니다. 라인별 생산코스트를 따져 그대로 다 지급하는 겁니다. 내부는 좀더 수평한 관계를 유지하고, 자율성을 가지고 스스로 사업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합니다. 경주와 예산을 3년씩 인큐베이팅 했는데, 경력이 오랜 직원이 많은 경주가 더 잘 정착하는 것 같아요. 이 제도를 보고 노사의 본질을 왜곡시킨다는 비판도 있는데, 산업혁명 초기에 생겨난 노사 개념을 복잡해진 산업화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오히려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선현 오토 회장 인터뷰[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김회장이 유독 자주 쓰는 '자주경영'이란 말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사람이 사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종속적으로 사는 게 불행한 거죠. 독립운동도 종속적으로 사는 불행을 타개하기 위한 운동이었죠.  명령받고 일하기 보다는 자율로 하는 것이 훨씬 즐겁습니다. 이걸 제도적으로 보완할 수 없을까를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자주경영제도를 생각한 것입니다."

이 대답에 대해 '독립운동'을 무릎교육으로 배운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철학이 아닐까 생각했다. 자주운동과 독립운동은 닮아있지 않은가. "개인도 나라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건 불행한 것"이라는 김회장의 말은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말에 김회장은 이런 말을 보탰다.

"집안의 영향일 것 같기는 하지만, 권력이 됐든 완력이 됐든, 억압받는 걸 보면 못 견디는 기질이 있습니다. 회사 내에서도 그런 일이 전혀 없을 수 없겠지만, 저 모르는 상태에서라도 누군가에게 억압받지 않는 그런 조직이 되기를 바랍니다."

독립운동가 자손으로 어떤 구체적인 도움이 됐는지 물어보았다.

"어렸을 땐 독립운동 가문에 대해 잘 느끼지 못했습니다. 제가 노동조합한다고 호주에 갈 때 할머니(정정화여사)는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어떤 결정을 하든 10년 후에도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하거라.' 저한테는 지표같은 분이었죠."

아마도, 할머니가 지금에 살아계셨더라면 김회장처럼 경영을 하고 있었을지 모르겠다고 말을 해주었다. 반대로 당시에 김회장이 있었더라도 똑같은 옳은 길을 찾아 나섰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는 이미 할머니를 생각하며 눈시울이 젖어 있었다. 그는 회사 상장 때 20억을 직원들 재단에 기부했다. 내년 임시정부 100주년에 재단을 만들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많이 하고 싶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다.

오토의 향후 20년은 어떻게 바뀔까. 김회장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지금까지는 변속기 부품을 만드는 회사로 큰 성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겁니다. 변속기는 화석연료 차량에는 긴요하지만 전기차에는 쓰임새가 줄어들 수 밖에 없죠. 동력 전달 장치가 간단해지면서 시장이 축소될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린 전기차에 들어가는 감속기 개발에 나서고 있습니다. 국가 사업인데 2년뒤면 판매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로봇 틈새사업이나 수소차 관련 사업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또 시장의 다변화도 중요합니다. 현재 베트남에 주력을 옮기고 있는 것도 그런 일환입니다. 1억 인구에 주위에 인도네시아, 인도, 미안마, 캄보디아까지 이어진 큰 시장에서 할 일이 많습니다. 특히 변속기 부품은 원래 완성차 회사에서 다 만들던 것인데, 이젠 완성차 시장이 스스로 변신해야 하니 부품사업을 내줄 수 밖에 없죠. 그것도 우리에겐 유리한 점입니다. 그런 현실적인 시장 타개로, 장기전략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함께 20년의 탑을 쌓아온 오토직원들에게 한 마디...

"기업의 비상시기라 조촐히 자축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한 20년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부심을 갖자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마음을 모아, 또다시 새로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기를."

머쓱하게 웃었지만, 김회장의 눈빛이 잠깐 간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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