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칼럼-중국정치7룡] 시진핑 누나의 축재...아버지 덕일까, 동생 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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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학교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18-08-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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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 ⑭

(왼쪽부터) 어머니 치신, 차오차오, 아버지 시중쉰[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큰 누나 치차오차오(齊橋橋)는 부친 시중쉰(習仲勳)이 제일 예뻐하고 애지중지한 그야말로 '내사랑 금지옥엽'이었다.

◆ 차오차오의 성씨개명 스토리

차오차오는 1949년 3월 1일 중국공산당 혁명 성지(당시 중공 수도) 옌안(延安) 차오얼거우(橋兒溝) 중앙의원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시중쉰은 두 번째 부인 치신(齊心)과의 첫 아이의 이름을 차오차오(橋橋)라고 지었다.

사람들은 차오차오(橋橋)의 성이 시(習)가 아니고 치(齊)라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길을 주고 받는다. 이에 차오차오는 이렇게 회고한다.

“중학교 입학 전까지만 해도 나의 성은 시였다. 베이징 간부 자제들의 학교 8·1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입학 며칠 후 부총리직을 맡고 있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베이징 근교 농촌 학교인 ‘허베이 베이징 중학’으로 전학 갔다. 학교 기숙사 설비가 형편 없었고 집에서도 멀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기숙사 생활을 하며 학우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공부하면서 평민의 본색을 유지하길 원했다. 아버지 동정은 늘 신문에 실렸다. '시’씨 성은 중국에서 희귀한 성씨(2013년말 기준, 중국 다성 순위 296위, 약 30만명)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가 쉬웠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나의 성을 '치'로 바꾸게 했다. 또 출신도 ‘혁명간부’에서 ‘평직원’으로 바꿨다.”

차오차오는 이때부터 치차오차오(齊橋橋)로 불리게 됐다.

◆ 말단 여직공에서 부동산 사업가로 변신

문화대혁명시 풍비박산된 전직 고관대작의 큰 딸, 차오차오는 내몽골의 오지 생산건설병단으로 던져져 최말단 여직공 생활을 하면서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어야 했다.

1978년 시중쉰이 복권돼 광둥성 당서기로 부임하면서 30세의 차오차오를 광둥성 해방군 제1군의대학(군의대학은 ‘제4군의대학’이 최고 명문)에 입학시켰다. 졸업 후 그는 무장경찰부대에 입대하고 성이 장(張)씨인 이름과 직업 등 인적사항 미상인 남자와 결혼했다.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 직전에 차오차오가 홍콩으로 노동자 신분으로 이주하면서 둘은 이혼했다. 둘 사이에 낳은 딸은 챠오차오가 양육을 맡았다.

현재 남편 덩자구이(鄧家貴)는 윈난성 출신으로, 1980년대 이미 담배사업으로 큰 재산을 모아 1990년대 베이징· 선전·홍콩에 여러 기업을 세운 중국판 신흥재벌이다. 치차오차오와 덩자구이는 1990년 홍콩에서 처음 만났다. 이듬해 그는 그녀에게 홍콩의 최고급 단지 '바오마산 화원(寶馬山花園)'의 수영장 딸린 고급빌라 한 채(약 300만 홍콩달러)를 약혼선물로 주었다. 둘은 1996년에 결혼하였다.
 

바오마산 화원 전경.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1992년 정계를 완전히 은퇴한 시중쉰이 홍콩과 인접한 선전에서 장기 거주할 때, 차오차오는 선전과 홍콩을 오가며 아버지의 시중을 들었다. 아버지가 2002년 사망하자 차오차오는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치차오차오는 이후 다시 홍콩기업가로 변신해 베이징과 선전 등지에서 부동산 개발사업을 하면서 엄청난 고수익을 올렸다. 차오차오는 남편과 함께 '베이징 중민신 부동산개발유한공사(北京中民信房地山開發有限公社)'를 설립해 자신은 동사장(회장), 남편은 총경리(사장)를 맡았다. 이들 부동산개발 동업자 부부는 베이징의 서부 중심지인 처궁좡대로(車公莊大路)에 호화 건축물 ‘관위안’(觀緣)과 총 대지 4만6000㎡, 건축면적 18만5000㎡ 면적의 고급 아파트 ‘징차오공관(京橋公館)'을 건설했다. 관위안은 베이징 지하철 2호선과 6호선의 환승 역세권과 주변에 중앙당정 핵심 12개 부처들이 분포된 베이징 정치·경제의 핵심지역 중 하나다.

차오차오의 부동산 사업은 수도 베이징에서만 대박을 터뜨린 건 아니다. 그는 '개혁개방 1번지' 선전에서도 돈을 쓸어 담았다. 2005년 1월 28일 남편 덩자구이는 선전시 지하철 부동산개발회사(深圳市地鐵遠爲房地産開發有限公社)를 설립했다. 선전시 지하철과 합작으로 지하철 라오제(老街) 지하철 역 주변을 개발해 빌딩을 지었다. 이 빌딩은 둥먼 라오제 시다먼(西大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선전에서도 가장 좋은 지역에 입지하고 있다.

◆ 시진핑 일가 축재 폭로한 해외 언론들
 

1995년 시진핑 푸젠성 부성장 시절 가족사진, 앞줄 가운데 시중쉰, 뒷줄 왼쪽 첫 번째 시진핑, 네 번째 치차오차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미국의 블룸버그 통신은 2012년 6월 29일 당시 시진핑 부주석 일가가 3억7600만달러(약 4300억원)규모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통신은 시진핑 일가(사실은 시진핑 누나 치차오차오와 남편 덩자구이)는 홍콩에서 자산 가치 5560만 달러로 추정되는 건물 7개를 소유하고 있으며, 17억 달러 이상의 자산가치가 있는 희토류 취급 회사의 주식 18%, 그리고 별도의 기술관련 기업의 지분 2000만달러(약 228억원)를 보유하고 있다고 시진핑 일가의 재산으로 뭉뚱그려 폭로성 보도를 했다. 통신은 다만 기사 말미에 시진핑 당시 부주석 자신이 친족의 사업에 유리하도록 관여하거나, 친족들이 부정 축재를 한 흔적은 없다는 글을 첨부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긴 했다.

그러나 이런 1차 정보의 제공자와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외신들의 ‘아니면 말고’ 식의 보도들이 오늘날까지 ‘겉으로는 성역없는 부정부패 척결, 속으로는 부정축재 친족들의 뒷배’라는 시진핑의 이중성(?)을 성토하고 뒷담화하는데 아주 좋은 재료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치차오차오의 축재는 동생 시진핑 덕분일까? 아버지 시중쉰 덕분일까?

차오차오가 영향력 막강한 중국 8대원로의 하나 시중쉰의 딸이 아니라 보통 중국 사람, 보통 부동산 업자였다면 이런 금싸라기땅들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아니 이보다 먼저, 부동산 신흥재벌 덩자구이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 덩자구이가 결혼 전 그녀에게 300만 달러 호화빌라를 약혼선물로 줄 수 있었을까?

차오차오 부부의 사업이 융성하고 재산이 폭증한 시기는 대부분 시진핑이 권력의 정상에 오르기 전이었다. 대야망을 품은 시진핑이 몸을 최대한 낮추고 은인자중하면서 도처에 도사린 정적들에게 단 한 점의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단 한 푼의 검은돈, 단 한 치의 검은 거래를 하지 않으려고 온몸의 신경을 집중 또 집중하던 때였다.

따라서 치차오차오의 축재는 성역 없는 부정부패 척결 업적 등으로 권력의 정상에 오른 동생 시진핑의 직접적인 후원을 받은 덕분(물론 간접적 후광은 배제할 수 없음)이라기보다는 아버지 시중쉰의 후광과 음덕을 입은 덕분으로 분석된다.

요컨대 아버지 시중쉰은 ‘합법·합리· 합정(合情)적’으로 아들 진핑에게는 권력을, 딸 차오차오에게는 재력을 물려 준 후원자 역할을 했다고 필자는 총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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