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중국정치7룡] "칭화대 학생→ 軍장교→현서기" 시진핑의 청년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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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18-05-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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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⑦

시진핑(오른쪽)과 천시. 칭화대 시절 둘은 단짝 친구였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시진핑이 천시에게 ‘1인 4직’ 고관대작 선물세트 준 까닭

1975년 시진핑(習近平)은 명문 칭화대 화공과(기본유기합성 전공)에 입학했다. 칭화대 재학시절 시진핑의 단짝 친구는 천시(陳希, 1953~ 현 중앙조직부장)였다. 시진핑과 천시, 둘은 같은 나이, 같은 학년, 같은 과, 같은 공농병 출신이었다. 둘은 낮에는 같은 강의실과 같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같은 기숙사동의 같은 방, 같은 이층침대 위 아래 칸을 나눠 썼다.

시진핑은 수업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정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공계보다 인문사회계에 적성이 맞는 그였다. 간단한 화학반응식과 주기율표도 이해하기 힘들었고 흥미도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재능을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차분하고 친절한 성격에다 타고난 이공학도 천시는 시진핑의 수업과 시험에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줬다.

시진핑이 인생에 상승곡선을 타기 시작한 해는 칭화대 4학년 시절 1978년, 부친 시중쉰(習仲勳)이 그해 3월 전국정치협상위원회 상임 부위원장으로 임명된 때부터이다.

아버지가 16년간 질곡의 세월을 마치고 중앙 정치무대에 복귀한 바로 다음 달인 4월 아들도 칭화대 당지부 서기로 선출되었다. 일개 학부생에 간부 교직원이라는 벼락감투를 쓰게 된 시진핑은 자신의 학업을 이끌어준 절친이자 멘토 겸 은인인 천시를 중국공산당에 입당시켜 주었다.

졸업 후 대학에 남은 천시는 1998년 칭화대 부서기(부총장) 재직시 당시 푸젠성 성장 시진핑에게 칭화대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을 주선했다. 

2017년 10월 시진핑 총서기는 천시에게 정치국원, 당 중앙조직부 부장,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당교 교장 등 ‘1인 4직’ 고관대작 선물세트로 답례했다.

◆입대 당일 영관급 장교가 된 사나이
 

겅뱌오 가족과 시진핑 1998년 푸젠성 서기시절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1978년 2월 칭화대를 졸업한 시진핑은 겅뱌오(耿飇, 1909~2000) 국무원 부총리 겸 군사위 비서장실 비서(현역 영관급 장교)에 배치됐다. 대학을 갓 졸업한 26세 청년에게 이처럼 막중한 자리가 주어진 배경은 당시 최고권력을 장악한 중앙군사위 부주석 덩샤오핑(鄧小平)의 각별한 배려였다. ‘붉은 사회주의 바다에 푸른 자본주의 섬 경제특구제’ 를 고안하여 ‘중국 질주’의 물꼬를 터준 시중쉰과 그 2세에 내려주는 하사품이었다. 심모원려가 듬뿍 담긴.



시진핑 정치 생애 중 최초의 직속 상관 겅뱌오는 시중쉰과 서북 황토고원에서 생사를 함께 한 전우였다. 겅뱌오는 선명한 개혁파 시중쉰과 달리 온건한 문혁파에 속했던 덕분으로 스웨덴·파키스탄·미얀마·알바니아 대사를 거쳐 장관급 이상인 당 대외연락부 부장을 역임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1976년 9월 9일 인민복을 입은 공산황제 마오쩌둥(毛澤東)이 염라대왕 곁으로 가자 겅뱌오는 기민하게, 은밀하게 예젠잉(葉劍英, 1897~1986년) 중앙군사위 부주석의 휘하에 들어 줄을 갈아탔다. 곧 10월 6일 예젠잉이 주도하는 ‘궁정 쿠데타’에 가담해 중앙라디오방송국과 TV방송국을 무력 점령, ‘4인방 분쇄’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덕분에 겅뱌오는 1977년 초 정치국 위원 겸 외교 군수산업, 관광담당 부총리에 임명되더니 1978년초 중국의 사실상 최고권력기관 중앙군사위의 비서장(사무총장)을 겸임하는 등 권력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1978년 3월 10일 시진핑은 돌연 군에 입대했다. 중앙군사위 비서장 사무실의 문건은 모두 비밀 금고에 보관돼 있다. 민간인은 물론 비서장의 처자식도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시진핑은 겅뱌오가 겸한 국무원 부총리와 중앙군사위 비서장 중 후자에 배속된 비서였다. 군사위 비서장 비서는 반드시 현역군인의 신분이어야 하기에 형식적으로나마 군입대 수속을 밟아야 했다. 입대 당일 장교로 임관된 시진핑에게 부여된 직급은 월봉 52위안의 부연대장급(중령급)이었다.

시진핑은 군복을 입은 현역 장교로서 군사위 비서장의 업무 스케줄, 내외빈 접대, 연설문 초안 작성 등을 맡았다. 문혁 시에 군 계급제가 폐지된 탓에 인민해방군 장교는 사병과 같은 군복을 입었다. 단, 장교의 군복은 상의 하단에 주머니 두 개가 더 있어 상의 주머니 4개는 장교를 의미했다. 회의 참석 기회가 많은 장교들의 '플러스(+) 2개' 주머니의 주 용도는 필기용 수첩 휴대이다. 하지만 시진핑의 +2개 주머니는 쓸모가 없었다. 겅뱌오는 시진핑에게 필기를 허용하지 않았고, 모든 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외우게 했다.

시진핑은 때때로 잔머리를 굴렸다. 수많은 안건이 논의된 마라톤 회의를 마치자마자 자신의 사무실에 달려 들어가 회의 요약을 쪽지에 기록한 뒤, 몰래 쪽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시진핑은 겅뱌오가 주재하거나 참가하는 중앙과 지방의 각급 각종 회의를 수행하면서 미래 군·당·정(軍∙黨∙政)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1980년 5~6월 2주 동안 겅뱌오를 수행해 미국을 방문하는 등 해외 견문도 넓혔다.

1982년 초 시진핑은 중앙군사위를 떠날 준비를 했다. 덩샤오핑에게서 모종의 암시를 받은 부친 시중쉰의 은근한 권고였다. 당시 겅뱌오가 속한 문혁파 잔당은 덩샤오핑의 개혁파에 밀리는 형세였다. 시진핑은 ‘지는 해’ 겅뱌오에 지방으로 전출할 의사를 밝혔다. 평생 군인 겅뱌오는 자신의 전속부관이 지방의 야전군 지휘관으로 전출을 희망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시진핑은 1982년 3월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부서기로 전근됐다.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300㎞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삼국지' 조자룡의 고향 정딩현은 당시 허베이성 관할이 아닌 중앙직속 관할지역이었다. 겅뱌오는 시진핑이 지방으로 떠난 2개월 후 군사위 비서장에서 해됐었다. 마치 침몰 직전의 배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것 같았다.

정딩현에서도 시진핑은 여전히 낡은 군복을 벗지 않았다. 정딩현 무장부대 정치위원(군부대 최고위직) 겸직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딩현 역사상 최연소 ‘사또’의 빛과 그림자

만 28세의 현 군∙당∙정 간부 시진핑은 현지 주민들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터놓고 지냈다. 말투는 겸허했고 허리를 낮추어 사람을 대했다. 식사는 일반 직원들과 똑같이 실외의 간이탁자에서 함께했다. 이동할 때는 관용차를 타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국가 부주석으로 취임한 2008년 이후 매년 한 차례 이상 정딩현을 방문하는 시진핑 주석은 이렇게 회고한다. “내가 오늘 이처럼 강건한 정신과 신체를 가지게 된 건 과거 정딩 현 부서기 시절 매일 30㎞ 이상 자전거로 시골 길을 누비며 행정 지원을 펼쳤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숙사 침대 위에는 7년 옌안 토굴생활에서부터 사용하던 100번도 넘게 기운 모포가 깔려 있었다. 지역 역사지리지 '정딩현지'을 통독하고 실제 답사를 통해 주요 상황을 파악했다. 낮에는 수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깊은 밤까지 독서하고 사색했다.

그는 현의 원로 간부들 의견을 경청하고 정책에 반영했다. 원로 간부들에게 우선적인 진료와 의약비를 제공하도록 제도화했다. 모든 사람을 그의 이름대로 가깝고 ‘근’(近) 평등 ‘평’(平)하게 대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이 안 좋아할 리 없었다.
 

정딩현에서 근무할 시절의 시진핑.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시진핑은 1983년 11월 30세의 나이로 현 서기로 승진했다. 정딩현 2000년 역사상 최연소 ‘사또’인 셈이었다. 정딩현에서 그의 최대업적은 룽궈푸(榮國府)라는 영화∙TV 드라마 촬영단지 건설이다. 소설 '홍루몽(紅樓夢)'과 똑같이 청나라 시대의 거리를 복구해 유명한 관광자원으로 개발한 것이다.


CCTV에서 홍루몽 임시 세트장을 짓고 촬영이 끝난 후 철거하기로 결정했지만 시진핑은 이것을 보존하기로 결정해 초대형 문화예술공간으로 만들었다.

또 조자룡의 고향 상산(常山) 부근을 대대적으로 개발해 역사테마파크 ‘상산공원’으로 변모시켰다. ‘룽궈푸’와 ‘상산공원’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고 정딩현은 중앙정부로부터 ‘중국관광 정딩모델’ 이 됐다.

시진핑은 일약 전도유망한 행정수장으로서 능력을 인정받게 됐다. 유명한 드라마 작가 커윈루(柯雲路)가 시진핑의 정딩현장 시절의 업적을 각색한 TV드라마 ‘신성(新星·샛별)'을 제작했다. 시진핑 현 서기는 1985년 4월 28일에서 5월 9일 허베이성 옥수수 가공 시찰단장 신분으로 미국 아이오와주 머스카틴 카운티를 방문했다. 그때 시진핑은 정딩현과 머스카틴 카운티와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빛이 환하면 그림자도 짙은 것인가?

2012년 10월 2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정딩현 서기 시절 시진핑의 어둠을 폭로한다. 1983년 시진핑 서기는 현내 가 6만여 가임여성에 대해 예외없는 산아제한 조치를 강제했다. 또 3만1000여명에게 영구불임시술을, 3만여명에게는 루프시술을 강행했다.

1983년 가을 어느 날 시진핑 현서기는 강력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그 본보기로 4명의 사형수를 도로건설 기공식장에 끌어내어 공개 총살을 집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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