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14] 바다 뱃길은 어떻게 열렸나? ①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2-15 09:18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좌절된 추가 일본 원정

[사진 = 바다 뱃길]

두 번의 원정 실패 후에도 쿠빌라이 정권은 한동안 일본에 대한 추가 원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두 차례 원정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이 태풍이었듯이 추가원정을 단행하지 못한 직접적인 원인도 제국 안에서 불어 닥친 반란의 태풍이었다. 쿠빌라이 정권 성립의 한 축 역할을 했던 동방 3가(家)가 일으킨 반란이 그 것이었다.

때문에 동쪽 병력을 일본으로 빼돌리기가 어려웠다. 5년 동안 이어진 반란을 잠재운 이듬해 쿠빌라이가 숨을 거두었으니 사실상 추가 일본 원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그 동안 일본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예상되는 추가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더 이상의 충돌은 없었지만 두 차례 일본 원정이 남긴 영향은 양측 모두에게 적지 않았다.

▶ 정경분리-교역 활발
무엇보다 몽골에게 남긴 가장 큰 영향은 두 차례의 원정이 남송 접수와 함께 손에 넣은 바다 경영의 방법을 익히고 그 것을 어느 정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됐다는 점이다. 몽골은 남송 접수와 함께 그들이 지니고 있던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바다와 관련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함께 얻었다.

그러한 해양기술과 지식은 중국의 강남사회가 오랫동안 쌓아온 것이었다. 유목민인 몽골인들에게 일본 원정은 이후 강남 사회를 발판으로 더 넓은 바다로 나가는 데 좋은 경험이 된 셈이다. 여기에서 괄목할만한 또 하나의 현상은 몽골과 일본 사이에 긴장이 계속됐지만 교역은 오히려 더 활발하게 진행됐다는 점이다.
 

[사진 = 신안 앞바다]

말하자면 정경분리 정책을 취했다는 얘기다. 이 원칙은 일본뿐 아니라 바다를 통해 동남아와 인도 지역 등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사진 = 신안 해저 유물선]

신안 유물선의 존재도 원나라와 일본 사이의 활발했던 교역을 입증하는 사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바로 경원항(영파)을 출발해 일본으로 가던 교역선이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것이다.
 

[사진 = 해저유물 발굴(1976년)]

▶ 중국-중동 바다 교역 길 확보

[사진 = 동남아 지도]

일본원정 후 중국 강남지역의 해안 도시에서 바다를 통해 동남아시아 지역과 인도양 방면으로 출병하는 부대가 많아졌다. 본격적인 군사원정이 아니어서 이들 부대의 원정은 대부분 실패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바닷길이 하나 둘씩 추가로 개척됐다. 원래 쿠빌라이 정권은 군사적 정복에 큰 무게를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바닷길이 열리고 통상이 이루어졌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적지 않았다.

쿠빌라이 후반기인 1292년에 비교적 큰 규모로 이루어졌던 자바원정도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 원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중국해와 자바해 그리고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뱃길은 몽골제국의 수중에 들어왔다. 중국의 남쪽에서 필리핀과 인도차이나반도 그리고 보르네오 섬으로 둘러싸여 있는 남중국해와 연결하는 뱃길이 열렸다.

이것은 중국에서 인도와 중동 이슬람 지역에 이르는 교역 길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무슬림 상인이 개척한 길
그 뱃길을 통해 중국과 이슬람 지역을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쪽의 중국 땅은 쿠빌라이가 장악하고 있었고 서쪽의 이슬람 지역은 훌레구 울루스, 즉 일한국이 장악하고 있어서 바다로 이어지는 동서 모두 몽골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닷길은 이 때 와서 다시 활발하게 연결됐다.

하지만 이 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무슬림상인들이 개척해 놓았던 길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지만 쿠빌라이 시대 바다교역의 중심 역할을 했던 무슬림의 바다를 통한 동진(東進)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렇다.

▶ 동방진출의 출발지 바그다드

[사진 = 알 만수르 추정도]

무슬림의 바다를 통한 동쪽 진출은 8세기 사라센 제국에 아바스(Abbasids)왕조가 들어서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사라센(Saracen)제국은 한 나라의 이름이 아니다. 칼리프(Caliph)가 지배하던 시대의 이슬람제국 또는 이슬람 교주국을 부르는 별칭이다. 칼리프란 모하메드의 대행자로서 정치와 군사 지도자인 이슬람 제국의 주권자, 통치자를 말한다.
 

[사진 = 티그리스강]

이 아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인 알 만수르(Al Mansur)가 792년,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지인 티그리스강 유역의 한적한 촌에 지금의 바그다드(Baghdad)인 대규모의 도시를 세웠다.

당시 바그다드에는 ‘평안한 수도’라는 의미의 ‘마디나 아살람’(Madinot-as-salam)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도시는 나중에 ‘하늘이 준 곳’이라는 의미의 페르시아 이름으로 바그다드로 불리게 된다. 알 만수르는 아바스 왕조의 1대 칼리프인 아불 아바스의 형으로 사실상의 왕조 창시자로 평가 받고 있다.
 

[사진 = 사담 후세인]

철권통치로 그는 후세의 사담 후세인에 비교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의 정치 골격을 만들고 문화발전의 바탕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천일야화’ 같은 문학도 그가 만든 문화발전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다. 티그리스 강가의 마스바 공원에는 지금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평화를 원하는 도시’ 바그다드

[사진 = 바그다드 주변지역]

이후 바그다드가 겪은 몇 차례의 참화를 보면 ‘평온한 수도’이기보다는 평화를 원하는 도시라는 이름이 적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몽골의 대군에게 아바스 왕조가 멸망하던 1258년 바그다드는 폐허가 됐다. 지난 1991년 걸프전 때 대규모 공습으로 바그다드는 다시 한 번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그 때의 후유증이 치유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 도시는 다시 한 번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의해 미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큰 상처를 입었다.

▶ 사라센 문화 개화의 중심지

[사진 = 마르코 폴로 귀환경로]

비운의 도시 바그다드는 그러나 아바스 왕조 초기에는 사라센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웠던 본거지였다. 사실상 진정한 이슬람 제국으로서 모습을 갖췄던 이 시기에 이슬람 지역은 바그다드를 중심지로 삼아 동으로 서로 교역을 확대해나가면서 한동안 번영을 누렸다. 특히 이슬람 지역은 위치상으로 동서양을 연결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래서 중개무역 형태로 많은 부를 끌어 들였다. 무슬림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의 연안 지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