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62] 전쟁영웅은 왜 급서(急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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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0-06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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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정권 능력의 시험대, 對金 마무리전쟁

[사진 = 오고타이칸 즉위식(집사 삽화) ]

칭기스칸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사라진 대몽골 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주변 세력들의 관심은 여기에 집중돼 있었다. 칭기스칸의 한 세대에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세계제국으로서 새로운 모양을 갖춰갈 것인가? 이러한 주변의 시선 속에 대칸 오고타이가 가장 먼저 손을 댄 일은 남쪽으로 밀려가 있는 금나라를 완전 말살시키는 일이었다. 이 전쟁 또한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 전쟁은 몽골제국의 능력을 시험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본보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고타이로서는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몽골제국의 건재함을 내외에 알리는 동시에 정권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새 체제 과시 위해 필요한 승리

[사진 = 툴루이 추정도]

이 작전에는 바투를 제외한 4명의 유력자가 모두 참여했다. 차가타이는 몽골의 본토를 지키는 일을 맡았고 오고타이와 툴루이 그리고 칭기스칸의 동생 옷치긴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전투에 앞장섰다. 칭기스칸이 사망한 시기를 전후해 남쪽 변경(汴京:개봉)으로 밀려가 있던 여진족의 금나라는 놀라운 생명력을 드러내며 재기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들을 방치할 경우 몽골제국이 한쪽 부분에서부터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여기에 새로 출범한 체제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서도 이 전투를 반드시 승리로 이끌 필요가 있었다. 10만 명 정도의 병력으로 30만 명에 달하는 금나라 군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정면 공격을 보다는 우회 공격으로 금나라의 숨통을 조여 가는 전략이 필요했다.

▶3분할 공격 작전 구사
대금(對金)작전에는 흉노이후 이어져 온 유목민 전통의 공격법이 다시 동원됐다. 군사를 세 곳으로 나누어 중앙과 좌우로 치고 들어가는 이 공격법은 1차 대금(對金) 전쟁에서도 대(對)호레즘 전쟁에서도 몽골군이 사용했던 전법이었다. 가운데 중군은 오고타이, 서쪽 우익군은 툴루이, 그리고 동쪽 좌익군은 옷치긴이 맡았다. 중군과 좌익군이 남하하면서 금나라를 압박해 가는 동안 우익군인 툴루이의 군대가 남하해 남쪽에서 치고 올라간다는 전략이었다.

[사진 = 중국 사천(泗川) 산악지대]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쪽은 서쪽 사천(泗川)의 산악지대를 지나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에서 변경으로 접근했던 툴루이軍이었다. 툴루이는 1230년 6월, 남송에 사신을 보내 남송의 영토를 통과해 금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해서 승낙을 받아냈다. 그 결과 툴루이군은 한수를 건너 금나라 영토로 진입할 수 있었다. 당황한 금나라는 15만 명의 주력군을 남쪽으로 내려 보냈다. 이에 맞서는 툴루이군은 3만 명에 불과했지만 금나라군은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지 않고 대치하면서 1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오고타이의 중군이 황하를 건너 변경으로 접근했다.
 

[사진 = 뮤지컬 군무]

금나라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 보낸 병력을 급히 불러 올려야할 상황이 됐다. 툴루이군은 철수하는 금나라 군대를 뒤쫓아 후방에서 괴롭히면서 마침내 이들을 삼봉산(三峰山)으로 밀어 넣는데 성공했다.

▶사라진 金왕조

[사진 = 중국 개봉(변경)]

1232년 겨울, 삼봉산(三峰山) 전투로 불리어지는 제 2차 대금전쟁으로 금왕조(金王朝)는 이미 운명이 다했다. 이 삼봉산에서 15만의 금나라 군대는 3만 명의 툴루이군과 최후의 결전을 치렀다. 툴루이군은 참호 속에 말과 함께 숨어 있다가 돌진해오는 금나라군에 대한 반격에 나서 닥치는 대로 베었고 추위와 허기에 지친 금나라군은 마치 풀잎처럼 쓰러졌다.

1233년 5월 개봉이 함락되자 금왕실의 애종(哀宗)은 남송과 가까운 채주(菜州)로 달아나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2년 뒤 몽골과 남송 연합군에 의해 포위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금왕조가 완전히 멸망한 것이다. 금나라가 몽골군을 피해 중도를 떠나 18년간 도읍으로 삼았던 변경은 처참한 모습으로 무너져 갔다.그나마 야율초재가 오고타이에게 이제 몽골재산이 된 개봉을 파괴하지 말 것을 설득해 어느 정도 모양을 보존할 수 있었다.

▶전쟁 영웅으로 거듭난 툴루이

[사진 = 공성전 벌이는 몽골군(집사)]

금나라 정벌작전은 완벽한 성공작이었다. 이로서 몽골은 칭기스칸이 없는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정권을 굳건히 지켜갈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줬다. 또 몽골의 푸른 군대는 여전히 무적의 군대라는 점을 내외에 과시했다. 이 전쟁의 영웅은 단연 툴루이였다. 차가타이는 편안하게 본영에 머물러 있었다. 전투에 나선 오고타이도 거의 싸우지 않았다. 반면 툴루이는 하남지역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금나라의 숨통을 죄었고 마침내 삼봉산 전투에서 금나라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갑자기 숨진 툴루이
그러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몽골고원으로 승전의 귀환을 한지 얼마 후 툴루이는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전쟁 후 8개월만의 일이었다. 그의 급사는 과도한 음주에 기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 = 오고타이칸 초상화]

대칸인 오고타이의 마음 속 병을 치유하기 위해 집안사람을 희생시키라는 샤먼의 신탁이 있었고 툴루이가 그 대상자가 됐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병을 얻은 형 오고타이 대신 큰 술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키는 바람에 의식이 혼미해져 숨졌다는 것이 사서가 남긴 기록이다. 그러나 이 설명은 무언가 흔쾌하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상황을 보면 툴루이는 경쟁자들의 야합에 의해 제거됐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라져 준 거추장스러운 존재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영웅으로 부상한 툴루이는 명성과 실력 등에 있어서 대칸의 그 것을 압도할 지경에 이르렀다. 오고타이도 툴루이의 동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될 정도가 됐다.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한 툴루이가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그리고 옷치긴 등 3인의 유력자에게 성가시고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존재가 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짐작대로 과정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툴루이는 절묘하다고 할 정도로 갑자기 죽어 주었다. 눈에 가시 같은 툴루이가 적절한 시점에서 사라져준 것이다.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그리고 옷치긴에게는 다행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이 절로 찾아와 준 것이다.

▶‘악화의 양화 구축’의 숱한 사례
그 상황이 과연 저절로 찾아 왔을까? 이제 막 전쟁에서 승리해 돌아온 마흔살의 건장한 장수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 실제의 상황이었을까?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국가나 단체나 기업이나 어떤 조직에서건 능력과 명망 있는 사람이 능력이 모자라고 신망이 낮은 사람에게 밀려나거나 제거되는 사례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의 세계에서나 숱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인물을 제거하는 방법은 아예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합심해서 존재를 말살시키거나 음해나 모함을 통해 머리칼이 잘린 삼손처럼 힘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야만 나머지 사람들이 발을 편하게 뻗고 잘 수 있기 때문이다.

▶툴루이 죽음으로 편해진 세 명의 유력자
툴루이가 제거된 후 나머지 유력자들이 발을 뻗고 편하게 살아간 흔적이 확실히 드러난다. 툴루이가 사라진 이후 차가타이는 마치 툴루이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오고타이의 적극적인 후원자로 나서 몽골 땅의 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대칸보다 더욱 요란스럽게 정권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했다.
 

[사진 = 유목민 산악 사냥]

옷치긴 역시 동방지역을 모두 장악하고 권한을 마음껏 누렸다.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사라진 뒤 몽골제국은 3명의 유력자에 의해 통치되는 이른바 삼두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전후의 사정이 툴루이의 죽음을 단순한 급사로 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의문 제기하지 않은 아들들

[사진 = 툴루이와 부인 소르칵타니(집사) ]

만일 툴루이의 죽음 과정이 조작된 것이라면 그 과정에는 툴루이의 아들인 뭉케와 쿠빌라이, 훌레구 등도 묵시적으로 눈을 감은 것으로 봐야 한다. 툴루이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부인 소르칵타니는 훗날 자기 아들들이 몽골제국을 장악하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현명하고 지적인 이 옛 케레이트의 공주 출신은 나중에 뭉케와 쿠빌라이로 이어지는 툴루가의 부활을 주도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대칸의 자리에 오른 툴루이의 두 아들과 페르시아 지역을 다스린 또 다른 아들 훌레구 모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남긴 원사나 집사 등 어느 사서에도
당시의 불화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 이미 정권을 장악한 입장에서 툴루이가 오고타이 등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기술하는 것은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진실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빈번한 유력자의 급서

[사진 = 몽골 전통 마유주(馬乳酒)]

툴루이의 급서뿐 아니라 이전에도, 이후에도 몽골의 황실에서는 원인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유력자의 급서가 자주 발생한다. 주치의 죽음과 3대 대칸 구육의 죽음 그리고 4대 대칸 뭉케의 죽음 등이 그렇다. 몽골비사와 원사 집사 등 어느 역사서도 이에 관해 명쾌하게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을 그려보면 그들의 죽음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될 뿐이다.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툴루이의 죽음과 함께 몽골제국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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