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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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1-2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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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전투를 가장 잘했던 빨치산 토벌대장

1951년 5월 18대대 시절 작전 중[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車一赫)은 빨치산 토벌을 통해 1951년에 ‘경찰의 보배’라는 말을 들었다. 전북 경찰수뇌부와 언론은 차일혁의 전투지휘능력 및 놀라운 전과를 보고 ‘전북경찰의 지보(至寶)’라며 높이 평가했다. ‘지보’라는 말은 “지극히 진귀한 보배”를 뜻한다.

전국에서 가장 빨치산 위협이 많았던 전라북도 산간지대의 빨치산들을 지략과 용맹함으로 신속히 토벌하여 빠른 시간 내에 치안을 안정시킨 차일혁의 뛰어난 전투지휘능력과 전공을 빗대어 한 말이었다. 당시 경찰수뇌부와 전북일보는 빨치산 토벌에 있어서 수많은 경찰부대 중 군계일학(群鷄一鶴)의 뛰어난 전공을 세우고 있는 차일혁의 제18전투경찰대대 및 철주(鐵舟)부대에 주목을 하게 됐고, 급기야는 차일혁의 전투경찰부대의 활약상을 생생히 알리자는 취지에서 김만석 전북일보 기자를 종군케 했다.

1951년 초의 상황이다. 경찰에서도 이를 흔쾌히 수락함으로써 “토비 300일 진중기(討匪 300일 陣中記)”라는 기사를 내보내게 됐다. 이때부터 차일혁이 지휘하는 경찰부대의 빨치산 토벌 상황은 신문지상을 통해 전북도내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됨으로써 경찰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게 됐다. 그렇게 볼 때 차일혁은 ‘전북경찰의 지보’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경찰의 보배’였던 셈이다.

차일혁이 토벌해야만 했던 빨치산들은 그 숫자나 전투원으로서 능력을 고려할 때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차일혁이 제18전투경찰대대장으로 임명되는 1950년 12월 중순 무렵 빨치산들은 남한 각지에서 여름철의 모기떼처럼 맹위(猛威)를 떨치고 있었다. 그 숫자는 국군의 정규 2개 군단과 맞먹는 6만 명에 달했다.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 근거는 국방부 자료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국방부가 1971년에 펴낸 《한국전쟁사: 총반격작전기》(제4권)에 의하면, “1950년 9월 30일부터 12월 31일까지 비상경비총사령부가 전국 경찰국장들로부터 보고받은 빨치산은 무장병력이 56,432명에 비무장병력이 4,000여명에 이른 것으로, 이는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숫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차일혁이 토벌대장으로 임명될 당시 빨치산은 전국적으로 6만명이 넘었다는 것이다.
 

제18 전투경찰대대를 지휘하는 차일혁 경감[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6·25전쟁 이전 전국경찰을 총지휘하던 내무부 치안국(治安局)은 전시 및 국가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치안국 내에 비상경비총사령부(非常警備總司令部)를 설치한 바 있다. 비상경비총사령부는 전시하의 전국경찰을 지휘하는 ‘경찰지휘총본부’ 격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6·25전쟁 발발 당시 경찰은, 오늘날 경찰청으로 독립된 경찰과는 직제 및 계급제도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후 국내치안을 위해 내무부에는 치안국을 두었고, 서울특별시와 각도에는 경찰국을 두었다. 경찰의 총수인 치안국장과 서울시경국장은 경찰계급이 아닌 공무원 신분의 이사관(理事官)이 맡았고, 각도 경찰국장은 경무관(警務官)이 보직됐다. 그러다 여순10·19사건 이후 경찰지휘체제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정부수립 이후인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제14연대에 침투한 남로당주도로 이뤄진 군 반란사건이 ‘여순10·19사건’이다.

군 반란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비상경비총사령부 체제를 갖추게 됐다. 이에 따라 경찰은 여순 10·19사건과 같은 국가적 위기사태 및 전시에 대비하여 치안국에는 비상경비총사령부를, 서울특별시와 각도에는 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비상경비총사령관에는 치안국장(治安局長)이, 그리고 각도 비상경비사령관에는 각도 경찰국장(警察局長)이 맡아 지휘하게 됐다.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치안국은 바로 비상경비총사령부 체제로 돌입하게 됐고, 전국의 164개 경찰서는 치안유지에서 북한군 및 후방의 빨치산들과 싸우는 전투경찰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6·25전쟁 당시 전국 경찰서장은 주로 총경(總警) 및 경감이 맡았다. 경찰서장 중에는 대통령과 중앙청 경호경비를 맡은 경무대(景武臺) 경찰서장이 가장 선임이었다.

경무대는 오늘날 청와대로서 대통령이 생활하는 관저(官邸)였고, 중앙청은 대통령 집무실과 각 부처 장관실이 있는 정부종합청사였다. 그렇게 볼 때 경무대경찰서장은 지금의 대통령경호실장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6·25전쟁 때 북한의 남침상황을 최초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한 사람도 경무대경찰서장 김장흥(金長興) 총경이었다. 그 후 경무대경찰서장은 자유당정권 말기 총경에서 경무관으로 직급이 올라갔고, 그 당시 경무대경찰서장 곽영주(郭永周) 경무관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때는 대통령 경호실이 별도로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경찰이 경무대 경비와 대통령 경호를 모두 전담하게 됐다. 경찰계급도 경무관(警務官), 총경, 경감, 경위, 경사, 순경 등 6계단으로 매우 단순했다. 현재는 경찰청장인 치안총감을 필두로 치안정감, 치안감, 경무관, 총경, 경정, 경감, 경위, 경사, 경장, 순경 등 11계단으로 과거에 비해 세분화됐다. 그런 점에서 1950년 말 차일혁이 제18전투경찰대대 대대장에 임명될 때 받은 경감(警監) 계급은 경무관과 총경 다음의 경찰서장 직책을 수행하는 비교적 높은 직급임을 알 수 있다.

차일혁이 경감 계급장을 달고 빨치산 토벌대장에 임명될 당시 전국에 걸쳐 준동하고 있는 빨치산 중 전라북도의 빨치산 세력이 가장 극성스러웠다. 국방부의《한국전쟁사: 총반격작전기》(제4권)에 의하면, “회문산지구에 1,200명(무장 300명, 비무장 900명), 고창지구에 1,100명(무장 900명, 비무장 200명), 가마골지역에 무장병력만 20,000명, 남원 천왕봉지역에 10,000명 등 총 32,300명에 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6만명에 달하는 전국의 빨치산들 중 절반 이상이 전라북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만큼 전라북도는 빨치산들이 활동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그것은 김제-정읍-고창을 연결하는 지역은 예로부터 식량이 풍부하여 빨치산들이 식량획득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인근에 높은 산악지대를 끼고 있어 게릴라 활동을 벌이는 데에 매우 유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인근 산악지역은 빨치산의 총본산 격인 ‘남부군사령부’가 있는 지리산을 비롯하여 회문산·내장산·덕유산 등으로 연결되어 있어 게릴라활동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전북의 빨치산들은 주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넘어가지 못한 인민군 패잔병들과 지역 내 골수 공산분자들이었다. 인민군 패잔병들은 박격포와 기관총 등 중화기를 가지고 있었고, 산으로 들어온 지역 내 공산주의자들은 지역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토벌부대에게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더욱이 빨치산들은 오랜 게릴라 활동으로 그들이 활동하고 있는 지형에 익숙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날다람쥐처럼 험준한 산악지형을 제집 드나들 듯 헤집고 다니는 ‘총을 든 산사람들’로 변해 있었다. 빨치산들은 주로 산골지역을 다니며 그곳 청년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그들의 무장력을 높였다. 자식들을 빨치산들에게 빼앗긴 산골주민들은 끌려간 자식들을 생각해서 토벌부대에게는 거리를 두면서도 빨치산들에게는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빨치산 토벌이 어려웠던 이유 중의 하나다. 빨치산들은 또 보급투쟁 등 그들이 필요할 때만 나타났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는 월남전에서 미군들이 여자와 노인 심지어 어린애를 이용한 베트콩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처럼 토벌부대들도 야음을 이용한 빨치산들의 기습공격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월남전에서 베트콩들은 “미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도 있었고, 또 공격하려고 하면 어디에도 없었다”는 어느 미군 지휘관의 말처럼, 차일혁이 토벌해야 될 빨치산들도 전북도내 곳곳 없는 데가 없다가 막상 토벌하려고 하면 어디에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차일혁의 경찰부대는 그런 빨치산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럼에도 차일혁 부대는 구이작전을 시작으로, 빨치산들을 전율케 했던 칠보작전, 고창작전, 정읍작전, 명덕리 작전, 가마골작전, 변산반도 작전, 외팔이 이상윤 사살, 지리산 빗점골 전투, 이현상 사살 등을 통해 다대(多大)한 전과를 올리며, 전북도내는 물론이고 지리산 일대의 후방지역을 안정시켜 나갔다. 차일혁이 경기관총 몇 정(挺)과 소총만으로 무장한 빈약한 경찰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잘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럴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다. 차일혁은 전투경찰 대대장에 임명되자 부대명칭을 백수(百獸)의 제왕인 호랑이를 본떠 ‘맹호부대’로 정했다. 산속의 빨치산들이 늑대나 하이에나와 같은 존재라면 차일혁 부대는 이를 잡아먹는 호랑이라는 데에 상징성을 두었다.

부대명칭부터 남달랐다. 국군 최초로 창설된 제1연대도 호랑이를 상징하는 ‘호(虎)부대’였다. 제1연대가 수도사단으로 편입되면서 수도사단이 맹호부대가 됐다. 맹호부대는 월남전에서 파월 국군의 명성을 떨쳤던 부대이다. 차일혁은 맹호부대라는 부대의 상징성을 통해 대원들의 자긍성을 높여 주고자 애썼다. 부대원들은 차일혁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전투를 통해 차츰차츰 빨치산들을 때려잡는 맹호처럼 변해갔다.

차일혁은 부대원들에게 “조국을 위하여 피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전투에 임해서는 절대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면서 익힌 전투에서의 철칙(鐵則)이었다. 그것은 자신에게도 적용시켰다. “전투 중 내가 후퇴하면 나에게 총을 쏴라, 여러분들이 후퇴하면 내가 총을 쏠 것이다. 공비들이 이 땅위에서 사라지는 날까지 용감히 싸우자!”며 ‘전투혼(戰鬪魂)’을 일깨우고 전투의지를 불살랐다. 차일혁은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배운 전술전기,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조선의용대 등 항일독립군으로서 일본군과 싸우며 익혔던 전투지휘 및 야전에서의 사격술 등을 빨치산 토벌에서 유감없이 발휘했다.

차일혁이 승리하는 데에는 유별난 특장(特長)이 있었다. 그것은 타고난 강건한 체력,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 자신의 명예와 진급보다는 부하들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부하사랑, 죽음에 연연하지 않고 앞장서는 진두지휘, 싸워 이길 수 있는 상태에서 전투하는 지략가로서의 현명함이 승리를 유발케 하는 요인들이었다. 차일혁은 적을 제압할 지략을 지녔고, 산에서 단련된 빨치산들을 능가할 체력을 가졌고, 부하의 희생을 최소로 줄이며 승리를 위해 어려운 전투일수록 선두에서 지휘하는 ‘따뜻한 용기’를 발휘했다.

6·25전쟁에서 활약한 숱한 경찰관 중 유별나게 차일혁이 돋보인 것도 바로 그런 인간미 넘치는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이 “베트콩 100명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했다면, 차일혁은 수 백명의 빨치산을 토벌한 후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도 1명의 희생당한 부하를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부모의 따뜻한 심장을 가진 맹호 같은 지휘관’이었다. 전투는 지휘관 혼자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부대원이 지휘관을 중심으로 공동의 작전목표를 위해 똘똘 뭉쳤을 때만이 완전한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차일혁이 전투를 잘하고 승리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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