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사각지대로 내몰리는 파산·면책자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09-10-01 07:26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대출·취업 제한…'현대판' 연좌제 비판

#) 친구가 사업자금을 대출받을 때 보증을 섰던 박명수(38, 가명)씨는 친구 사업이 망하면서 3억원에 달하는 보증채무를 떠안게 됐다. 빚을 갚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봤지만 감당할 수가 없어 결국 2006년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고 2007년 면책 판결을 받았다.

2년 가량을 백수로 지내던 박씨는 지난해 한 중소기업에 취직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됐지만 경기침체로 회사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최근 3개월째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다.

회사 측은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근로복지공단이 운용하는 '희망드림 임금대부' 제도를 활용해보라고 권유했다. 3개월 이상 임금이 체불된 근로자들에게 연 2.3%의 저금리로 최대 700만원까지 지원해주는 공공 대출 제도다.

이자는 회사에서 대납해주기로 했지만 박씨는 이 제도를 이용할 수 없었다. 파산·면책자는 신청이 제한된다는 요건 때문이었다. 이런 박씨의 사정을 모르는 회사 동료들은 아직 경제적 여유가 있어 대출을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장 생활비 걱정을 해야 할 처지가 된 박씨는 그동안 모은 300만원을 가지고 한 시중은행에 예금담보카드를 신청했다. 그러나 이 역시 파산·면책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현재 박씨는 주중에는 폐업 위기에 처한 회사에서 시간을 때우고 주말에는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일당 3만원을 받는 지게꾼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경기침체로 빚더미에 올라앉는 서민들이 늘고 있다. 정부는 경기부양과 내수 활성화를 위해 서민 가계를 지원하는 정책을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정책의 향연에 초대받지 못하고 잿빛 미래에 절망하며 살아가는 계층이 있다.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가 빚을 탕감받은 면책자들은 경제·사회적 불이익 속에서 금융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다.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과도한 채무를 견디지 못하고 파산 신청을 하는 서민들이 급증하고 있다. 8월 말 현재 법원에 접수된 파산 신청 건수는 7만4942건으로 지난해 기록(11만8571건)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법률구조공단 통계에 따르면 파산 법률구조 건수는 지난 2007년 3659건, 2008년 4336건 등으로 매년 증가하고 있다. 특히 올 들어서는 7월 말 현재 이미 5000건을 넘어섰다.

공단 관계자는 "최근 수년간 파산 건수가 증가세를 보여 왔지만 지난해 말부터 경기침체가 본격화하면서 올해는 더욱 급증했다"고 설명했다.

개인파산 제도는 지나치게 많은 빚을 진 채무자를 대상으로 빚을 탕감해주고 재기를 돕는 회생 제도다. 법원이 파산 선고를 하고 면책 판결을 내리면 기존 채무에 대한 책임 없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제도의 취지와는 달리 파산·면책 기록은 '특수기록 1201'이라는 이름으로 7년간 은행연합회 등에 보존된다. 또 국내 3대 신용정보회사는 7년이 지나 특수기록이 삭제된 후에도 5년 동안 추가로 관련 기록을 신용등급 산정에 활용할 수 있다.

총 12년 동안 파산·면책자는 대출·카드신청·취업 등에서 제한을 받는다. 사실상 정상적인 금융 거래가 불가능한 셈이다.

지난 2007년 면책 판결을 받은 후 2년이 지난 김수용(32, 가명)씨는 최근 결혼을 앞두고 은행에 전세자금대출을 신청했지만 불가 판정을 받았다.

김씨는 "은행권 채무가 없는데도 대출을 해준다는 시중은행은 한 곳도 없다"며 "작은 보금자리조차 마련할 수 없는 것이 파산·면책자의 현실인 것 같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부의 친서민 정책도 파산·면책자들에게는 다른 나라 얘기다.

가계 부실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올 상반기 중 신용회복위원회에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해 구제를 받은 금융소외자는 총 3만5752명에 달한다. 정부는 이들에게 채무 상환기간 연장, 채무액 및 이자 감면 등의 혜택을 제공하며 재기를 돕고 있다.

90일 미만의 단기 연체자를 지원하는 사전채무조정(프리워크아웃) 대상자도 지난 2분기에만 5725명을 기록했다. 그러나 파산·면책자에 대한 별도의 지원책은 나오지 않았다.

최근 정부는 10년간 2조원을 투입해 저신용층의 창업을 지원하는 '미소금융재단'을 설립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재단 설립이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친서민 정책의 결정판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파산·면책자는 미소금융재단의 지원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개인 파산제도는 개인 워크아웃과 달리 보증인에 대한 채권추심을 가능토록 하고 있다. 파산·면책자는 정상적인 금융거래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채권추심에 시달리는 이중고 속에서 고금리 사금융으로 내몰리고 있다.

국민권익위원회 관계자는 "최근 파산·면책자에 대한 특수기록 보존 기간을 7년에서 3년으로 완화하는 내용의 권고안을 금융위원회에 제출했다"며 "과거 기록을 이유로 재기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은 현대판 '연좌제'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했다.

아주경제= 이재호 기자 gggtttppp@ajnews.co.kr
(아주경제=ajnews.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