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국내 방송에 자주 출연하는 미국인 방송인이 있다. 언어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그조차 한국의 수능 영어 문제를 접하고 정답을 쉽게 고르기 어렵다고 토로하는 장면이 여러 차례 화제가 되었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낯선 추상적 지문과 미묘한 선택지를 우리 고등학생들은 대학에 가기 위해 풀고 있다. 그렇다고 수능 영어의 난도나 변별력이 적절한지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대학입시에는 평가 기능이 있고, 변별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는 별도로 논의할 문제이다. 필자가 묻고 싶은 것은 그보다 근본적인 질문이다. 영어교육이 수능을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수능 영어가 영어교육의 성과를 평가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교육의 원칙에서 보면 답은 자명하다. 먼저 교육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교육 내용과 방법을 마련한 뒤 그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평가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순서가 자주 뒤집힌다. 수능에 나오기 때문에 가르치고, 수능에 나오기 때문에 배우며, 한 문제라도 더 맞히기 위해 선택지의 미세한 차이를 가려내는 온갖 문제 풀이 기술을 익힌다. 시험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을 ‘워시백(washback)’이라고 한다. 평가가 교육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평가가 교육의 내용과 목적까지 지배하기 시작한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시험은 교육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교육이 시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우리가 영어를 사용하는 환경은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생성형 AI와 번역 기술의 발전 때문이다. 해외여행 중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길을 묻는 정도의 일상적인 대화는 휴대전화 앱으로 해결할 수 있다. 반대로 난해한 영어도 마찬가지이다. 복잡한 영어 지문을 AI에 입력하면 몇 초 만에 번역하고 요약하며 문장의 논리구조까지 설명해 준다. 법률, 의학, 공학과 같은 전문 분야 문서도 AI의 도움을 받아 읽고 작성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쉬운 영어도 AI가 통역하고 어려운 영어도 AI가 번역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영어로 가르쳐야 하는가.
필자의 답은 ‘그러니 영어를 배우지 말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이제는 한정된 교육 시간과 학습 노력을 어디에 투입할 것인지, 말하자면 영어교육의 ‘가성비’를 따져야 한다. 기계가 할 수 있다는 것과 기계에 맡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외국인을 만나 “반갑습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메일로 보내주시겠습니까”라고 말할 때마다 휴대전화를 꺼내 번역 앱을 실행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말까지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 과연 효율적일까.
이러한 표현은 한 번 체화(體化)해 놓으면 평생 수백 번, 수천 번 사용할 수 있다. 학습에 투입한 시간에 비해 활용 빈도가 매우 높다. 반면 일상생활에서 접할 가능성이 낮은 난해하고 추상적인 지문을 해독하기 위해 방대한 어휘와 문제풀이 기술을 익히는 데 막대한 시간을 투입하는 것은 AI 시대에 비용과 편익을 다시 계산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사용 빈도만으로 교육의 가치를 판단할 수는 없다. 어려운 글을 읽는 과정에서 논리적 사고력과 문해력을 기를 수도 있다. 대학에서 공부하려면 일정한 수준의 학술적 독해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을 반드시 영어로 된 난해한 지문과 정답 찾기 훈련을 통해 길러야 하는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논리적 사고력과 문해력을 평가한다는 명분으로 실제 언어생활과 동떨어진 지문, 불필요하게 어려운 어휘, 선택지 사이의 미세한 차이를 가려내는 기술까지 모든 학생에게 요구하는 것이 적절한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AI 시대의 영어교육에는 새로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자주 사용하는 영어는 학생의 머릿속에 넣고 직접 듣고 말하게 하자. 드물고 어려운 영어는 AI와 협업하여 처리하게 하자. 일상생활과 기본적인 업무에 필요한 듣기와 말하기는 충분히 체화시키고, 일반적인 읽기와 쓰기에서는 자신의 영어 능력을 토대로 AI를 보조적으로 활용하도록 가르치면 된다. AI가 내놓은 결과를 검증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모든 학생이 전문 번역가나 영어학자 수준의 검증 능력을 갖출 필요는 없지만 AI의 번역이 원문의 취지를 벗어나지 않았는지, 중요한 정보가 누락되지는 않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본적인 독해력은 갖추어야 한다. AI 시대의 영어교육은 영어를 포기하는 교육이 아니라 영어를 바탕으로 AI를 제대로 사용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고도의 전문 영역에서는 더욱 섬세한 언어능력이 필요하다. 법률, 의학, 공학 문서에서 AI가 저지른 작은 오류 하나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준의 검증은 해당 분야 전문 지식과 특수목적 영어(ESP) 능력을 갖춘 전문 인력이 담당해야 한다. 보편 교육으로서 학교 영어가 모든 학생을 전문적인 영어 사용자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필요는 없다. 학교 영어교육은 학생들이 AI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기본적인 의사소통과 업무를 주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이 말이 문법과 어휘, 독해 교육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말하기 역시 어휘와 문법이라는 토대 없이 가능하지 않다. 영어교육을 단순한 회화 교육으로 바꾸자는 주장도 아니다. 핵심은 모든 영어를 인간의 머릿속에 저장하려 했던 교육에서 벗어나 사람이 직접 체화할 영역과 AI의 도움을 받아 처리할 영역, 전문가에게 맡길 영역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 현장에서 이러한 교육이 가능한가. 과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필자의 학창 시절처럼 한 교실에 50명, 60명의 학생이 콩나물시루처럼 앉아 있던 상황을 생각해 보자. 교사가 학생 한 명에게 1분씩 영어를 말하게 해도 수업 시간이 끝나 버린다. 교사가 칠판 앞에서 문법과 독해를 설명하고 학생들이 듣는 방식은 당시 교육 환경에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학령인구 감소로 과거보다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든 학교가 많아졌고, 소규모 말하기 활동을 시도할 수 있는 여건도 점차 나아지고 있다. 더구나 오늘날 학생에게는 새로운 개인교사도 생겼다. 바로 AI이다. 학생은 수업 밖에서도 AI를 상대로 얼마든지 영어를 듣고 말하며, 자신의 표현을 교정받고, 자신의 수준에 맞추어 반복해서 연습할 수 있다.
난수표처럼 복잡한 문법 용어를 외우게 하고, 실제 소통과 동떨어진 독해 문제를 반복해서 풀게 하는 방식은 AI 시대에 교육적 설득력을 잃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영어에 관한 지식을 더 많이 설명하는 수업이 아니라 학생이 영어를 실제로 듣고 말하고 읽고 쓰도록 하는 수업이다. 평생 수천 번 사용할 영어만큼은 학생 자신의 귀로 듣고 자신의 입으로 말할 수 있게 하자. 자주 쓰는 영어는 사람이 직접 하고, 드물고 어려운 영어는 AI와 협업하게 하자. 교실의 여건도 달라지고 있고 기술은 이미 앞서가고 있다. 이제 영어교육의 판을 바꿀 때이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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