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 총성이 멈춘다 해도 전쟁의 여진은 멈추지 않는다. 이번 위기는 유가 급등이나 일시적 공급 차질을 넘어, 아시아의 산업과 에너지, 안보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구조적 전환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종전은 끝이 아니라 변화가 본격화되는 시점에 가깝다.
이미 충격은 전장의 경계를 넘어 아시아의 공장과 가계, 정책의 중심부까지 침투했고, 그 양상은 단순한 비용 상승을 넘어 체제 자체를 재편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번 위기는 에너지에서 시작됐지만, 이미 산업 전반으로 번졌다. 그 중심에는 나프타가 있다.
플라스틱과 화학제품의 기초 원료인 나프타 공급이 흔들리면서 가격이 급등했고, 도료와 시멘트, 포장재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일부 생산시설이 가동 중단 위기에 직면했고, 중소기업들은 원재료 확보 경쟁에서 밀려 ‘생산 중단’이라는 현실적 선택지 앞에 놓였다.
이처럼 에너지에서 시작된 충격이 제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과정은 현대 산업 구조의 정밀한 연결성과 동시에 그 취약성을 드러낸다.
특히 아시아는 중동 의존도가 높은 데다 재고를 극도로 압축한 ‘적시생산(Just-in-Time)’ 기반의 린 공급망에 깊이 의존해왔다는 점에서 충격을 더 크게 받고 있다. 결국 기업들은 비용 효율이 아닌 공급 안정성을 중심으로 전략을 재설계할 수밖에 없는 국면에 들어섰다.
정책의 방향도 흔들리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아시아 각국은 친환경 정책을 후퇴시키고 석탄과 원자력으로 회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은 석탄 발전 규제를 완화하고 원전 재가동을 서두르고 있으며, 동남아 국가들도 석탄 발전을 재개하고 있다.
이는 단기적으로 분명한 후퇴다. 실제로 탄소 배출이 일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이 후퇴는 역설적으로 에너지 전환을 가속하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정학적 리스크에 따라 가격이 요동치는 화석연료 구조 자체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증권 김도현 연구원이 “지정학적 불안정에 가격이 좌우되는 구조에서 벗어나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은 청정에너지”라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번 전쟁은 에너지 문제를 환경이 아닌 안보의 문제로 끌어올렸고, 그 순간부터 탈탄소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으로 전환되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안보에서 나타난다. 이번 전쟁은 미국 중심의 안보 질서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중동 대응 과정에서 일부 미군 전력이 한반도에서 이동하면서 나타난 ‘일시적 공백’은 동맹 의존 구조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아시아 국가들은 ‘안보의 외주화’를 줄이고 자립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일본은 사상 최대 방위비를 편성했고, 한국 역시 자주국방과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논의를 가속화하고 있으며, 인도 또한 국방 지출 확대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외교안보연구원의 인남식 교수는 “군비 증강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는 이번 변화가 일시적 대응이 아니라 구조적 흐름임을 보여준다. 아시아는 더 이상 안보를 수입하는 지역이 아니라 스스로 생산하는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 중심 질서에서 다극적 안보 구조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금융시장 역시 이 구조적 변화 속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 유가 상승과 환율 불안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원화는 약세를 보이고 국채 금리는 기준금리와 괴리된 채 상승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정책 대응 여력이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시장 개입과 재정 투입 등 단기 처방이 반복될수록 정책의 일관성과 신뢰가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 싱크탱크들이 한국의 대응 방식이 시장 예측 가능성을 저해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단순한 시장 변동성이 아니라 위기 대응 체계 자체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신호다.
결국 이번 중동 전쟁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구조적 재편의 시작이다. 과거 오일쇼크가 에너지 가격을 중심으로 경제를 흔들었다면, 이번 위기는 원유뿐 아니라 액화천연가스(LNG), 비료, 반도체 소재까지 동시에 교란하는 복합적 충격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깊고 넓다.
버지니아공대 데이비드 비에리 교수의 지적처럼 “LNG와 첨단 공급망까지 동시에 흔들리는 점”이 이번 위기를 과거와 구분 짓는다.
이 변화는 종전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종전 이후 더 빠르게 굳어진다. 에너지는 더 이상 비용이 아니라 안보의 문제가 되었고, 공급망은 효율보다 회복력이 우선되는 구조로 재편되고 있으며, 안보는 동맹이 아닌 자립의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 아시아는 지금 전쟁을 견디는 단계를 넘어, 전쟁 이후의 질서를 재설계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이번 위기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유가가 아니라, 세계가 더 이상 과거의 안정된 구조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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