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혜숙 이화여자대학교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한국공학한림원에서는 작년 말 반도체특별위원회 보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매년 위원회가 활동한 내용을 정리하여 발표하는데, 이번 보고회에서는 특별히 ‘AI 반도체 강국도약 가이드라인’이라는 내용으로 발표하였다. AI가 국가와 산업, 사회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가 되었으며,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투어 자체적으로 데이터를 학습하고 추론하는 AI 반도체 개발을 위해 경쟁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AI 반도체에 대한 각국의 지원정책, 대한민국의 생태계 현황, AI 반도체 강국이 되기 위한 제언을 발표한 것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대한민국은 반도체 강국으로 디램(DRAM)과 낸드플래시 시장을 장기간 주도하며 세계 최고의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유지해왔으며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60~70%를 장악하고 있다. 특히 AI 반도체의 성능을 좌우하는 고대역 메모리(HBM)에서 압도적 경쟁력을 갖고 있으며, 대규모 설비 투자, 공정 기술, 수율 관리 등 메모리 반도체 제조 중심 역량에서 다른 나라가 쉽게 따라오기 어려운 기술적 우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성장 동력은 메모리에서 시스템 반도체로 이동하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는 전자기기에서 연산, 신호 처리, 제어 등을 담당하는 맞춤형 칩으로, AI 반도체를 비롯하여 모바일 응용 프로세서, 차량용 반도체, 통신·전력·센서 칩 등 고부가가치 영역 대부분이 시스템 반도체에 속한다.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3배에 달하는 매우 큰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2~3%에 그쳐 많은 반도체 부품들이 해외에서 수입되고 있다. 일례로 K-방산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수출 주력 산업으로 전차, 자주포, 미사일, 항공기 등 완성 무기체계가 국산의 이름으로 해외에 수출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 국내 생산 무기체계에 들어가는 방위용 반도체, 전력반도체, 레이더 송수신 모듈, 통신·위상 안정성 장치, 우주·특수 전자부품 등 핵심 부품 전반에 걸쳐 무려 98%가 수입 반도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1987년 대만 정부 주도로 TSMC가 설립될 당시부터, 반도체 산업에서 ‘설계는 팹리스, 제조는 파운드리’라는 분업 구조가 명확히 확립되었다. TSMC는 주 고객인 팹리스와 경쟁하지 않는 순수 파운드리 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하며 팹리스를 지원하는 파트너로 자리매김했고, 팹리스의 성공이 자사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비즈니스 전략을 정착시켰다. 이러한 전략은 결과적으로 다수의 팹리스 기업의 창업과 성장을 촉진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둘째, 대만에는 중소 팹리스가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잘 다져져 있다. 대만에는 앞서 언급된 세계적 팹리스 대기업뿐 아니라, 특정 응용 분야에 특화된 중소·중견 팹리스 기업들이 촘촘히 분포해 있다. 이들이 반도체 산업단지 내에서 파운드리, IP 벤더, 패키징 업체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신속하게 제품을 만들어 검증하고 빠르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구조를 갖는다.
셋째, 대만의 팹리스 기업들은 칩 성능 경쟁이 아닌 시스템 중심의 경쟁을 하고 있다. 스마트폰, 서버, 네트워크, 자동차 등 완성 시스템과 애플리케이션 중심의 설계 역량을 축적했고, 소프트웨어·펌웨어와의 결합을 자연스럽게 내재화했다. 이는 고객 락인(lock-in)과 장기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는 단순 칩 중심의 설계 및 제조 구조를 넘어 플랫폼과 서비스까지 아우르는 구조로 확장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도약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설비 투자 확대나 몇 개의 유망 팹리스 기업 육성이 아닌, 설계(팹리스), 제조(파운드리), 패키징, 소프트웨어, 수요 시스템 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팹리스가 초기의 투자 부담과 성공까지의 불확실성이 큰 위험을 감당하며 도전할 수 있는 시장 환경, 파운드리가 장기적 관점에서 팹리스의 파트너 역할을 수행하는 구조, 대학·연구기관·산업 간 인력과 기술이 순환하는 체계, 소프트웨어와 시스템 관점의 반도체 교육과 R&D 전략, 생태계 구축을 향한 수요 기업의 강한 의지 등 모든 요소가 맞물려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가 작동할 수 있는 구조 자체를 설계하고 이러한 구조가 지속적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미국·중국·일본·대만·EU의 주요 국가들에서는 이미 AI 반도체를 포함하는 시스템 반도체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규정하고, 다층적인 지원정책을 통해 기술 자립과 산업 생태계 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의 성공 경험은 대한민국의 중요한 자산이지만, 시스템 반도체에 똑같은 성공 공식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시스템 반도체는 ‘혼자 잘해서 되는 산업’이 아니라 ‘함께 잘해야 성장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태계를 조성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첨단 산업의 핵심 두뇌이며 심장인 시스템 반도체를 계속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이 바로 대한민국이 반도체 전략의 초점을 ‘개별 기술’에서 ‘생태계 구축’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이다.
필자 주요 이력
△이화여대 전자전기공학전공 교수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 전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 제50대 대한전자공학회 회장 △IEEE Fel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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