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56) 어르고 뺨 치기 - 구밀복검(口密腹劍)

유재혁 칼럼니스트
[유재혁 칼럼니스트]

생필품을 대량으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대형마트에 가서 정기적으로 장을 보는 건 중산층 도시 거주자들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특히 주중에 따로 장 볼 시간을 내기 어려운 맞벌이 부부에게 주말 마트 쇼핑은 빼놓을 수 없는 행사로 자리잡았다. 이런 소비 트렌드에 힘입어 성장을 구가하던 대형마트에 제동이 걸린 건 온라인 배송업체들의 등장 때문이다. 

On이 Off를 압도하는 시대다. 온라인으로 주도권이 넘어간 상황에서 온라인 배송업체의 선두주자 쿠팡의 고속성장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휴대폰에서 손가락 몇 번 움직여 주문하기만 하면 온갖 물품을 집 대문 앞까지 가져다 주는 배송 시스템은 시간에 쫓기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다시없는 문명의 혜택이요 축복이다. 바야흐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온라인 구매를 외면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됐다.

이커머스 시장은 시간 싸움이다. 업체 간의 속도 경쟁은 익일배송을 새벽배송으로 진화시켰다. 밤 12시 이전에만 주문하면 다음날 아침 7시까지 로켓처럼 배달해 주는 새벽배송은 편리함과 신속함의 극치다. 한 번도 이용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이용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하다. 쿠팡이 작년 8월 월회비를 4900원에서 7890원으로 58%나 인상했음에도 우려와 달리 이탈 회원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새벽배송에 대한 소비자 충성도가 얼마나 강고한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집도 갈수록 쿠팡 이용 횟수가 늘더니 어느 시점부터 대형마트에서 지출한 돈보다 쿠팡 결제금액이 더 커졌다. 막대한 초기 투자비용 때문에 적자를 면치 못하던 쿠팡이 흑자로 돌아서고 대형마트가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지난달 22일 민노총 산하 전국택배노조가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출범한 '택배 사회적 대화 기구' 회의에서 자정부터 오전 5시까지 새벽배송을 금지하자고 제안했다. 다시 말해 새벽배송을 하지 말자는 거다. 도시생활인 일상에 깊숙이 자리잡아 대체 불가의 존재가 된 새벽배송을 민노총은 아니 왜~? 노동자의 수면 시간과 건강권을 보장하자는 취지란다. 명분이 그럴 듯하니 선뜻 반대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절대의석수를 앞세워 수틀리면 일단 입법 발의부터 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길 주저하지 않는 거대 집권여당 민주당이 우리편이라고 애지중지하는 민노총 아닌가. 그들이 하고자 하는 걸 어찌 막으랴.

그럼에도 새벽배송을 금지하겠다는 민노총의 움직임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워낙 크다. 택배기사, 소비자, 소상공인들 할 것 없이 이해관계자 모두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우선 새벽배송을 담당하는 택배기사들의 입장을 들어보자. 자신들의 건강을 챙겨주고 과로사를 방지해 주겠다는데 택배기사들은 왜 반대할까? 건강권 이전에 생존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새벽배송이 금지되면 당장 밥줄이 끊기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쿠팡 위탁 택배기사 1만명이 소속된 택배영업점 단체인 쿠팡파트너스연합회(CPA)와 쿠팡노조가 새벽배송 금지로 인한 고용안정과 임금보전은 누가 책임질 거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새벽배송 안 해서 잠 제때 충분히 자고 건강이 좋아진들 밥 사먹을 돈이 없으면 그 건강이 제대로 유지되겠는가. 

새벽배송 수혜자라고는 하나 소상공인들과 소비자들의 사정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소상공인들은 새벽배송이 제한되면 온라인 판로가 막혀 막대한 매출 손실이 불을 보듯 뻔하다. 새벽배송으로 식재료를 받아 하루 장사를 시작하는 소상공인들은 장사를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새벽배송을 통해 생필품을 구입하는 게 일상사가 된지 오래인 소비자들은 또 어찌 해야 하나.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서 아파트 1층 현관까지 걸어서 내려가다 보면 문앞에 쿠팡, SSG, 마켓컬리 등으로부터 새벽에 배송된 프레시백이 놓여있지 않은 집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죽하면 워킹맘들이 새벽배송 금지를 막아달라는 국민 청원을 올렸을까.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새벽배송을 원하고 또 필요로 한다. 민노총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새벽배송을 금지하자고 했을까? 민노총의 의도가 궁금하던 차에 쿠팡노조의 폭로가 터져나왔다. 정치적 활동에 대한 강요가 싫어 2년 전 감히(?) 민노총을 탈퇴한 '쿠팡노조 길들이기'라는 거다. 실제로 민노총은 쿠팡노조가 민노총 소속일 때는 단 한 번도 새벽배송을 금지하자는 주장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세상사에는 늘 그 나름의 이유와 곡절이 있기 마련이라더니 민노총이 불쑥 새벽배송 금지를 주장하고 CPA가 "민노총이 심야 배송 택배기사를 사실상 해고하려는 것"이라며 반발하는 데에는 이런 속사정이 숨어 있다. 

'구밀복검(口密腹劍)'이라는 성어가 있다. '입에는 꿀을 바르고 뱃속에는 칼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 이 성어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개원의 치'로 칭송받던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로 인해 유흥과 주색에 빠질 즈음 재상 자리에 오른 이임보(李林甫)는 황제의 뜻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환심을 사는 재주가 탁월해 장장 19년이나 재상 자리를 지켰다. 사람들을 늘 상냥하게 대했지만 실제로 그는 음험하고 술수에 뛰어난 모사꾼이었다.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했으며 신하의 충언이나 간언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당시 좌승상 이적지(李適之)는 정직하고 유능하여 현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런 이적지가 이임보에게는 눈엣가시였다. 하루는 이임보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적지에게 말하기를, "화산(華山)에 황금이 많이 묻혀 있으니 채굴을 하면 나라의 부가 크게 늘어날 텐데 안타깝게도 황제가 아직 모르고 계시오." 이 말을 듣고 이적지가 황제에게 조속히 채굴할 것을 건의했다. 황제가 이임보의 의견을 묻자 놀랍게도 그의 답은 이러했다. "화산은 당조(唐朝)의 기반이니 이는 왕기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현종은 대노하여 즉각 이적지를 파직하였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자 모두들 이임보를 두고 "입에는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口有蜜腹有劍)"고 수군거리며 두려워했다. 

이 '구유밀복유검(口有蜜腹有劍)'이 줄어서 사자성어 '구밀복검'이 됐다. 출전은 《신당서》와 《십팔사략》이다. '구밀복검'은 겉으로는 좋은 의도를 내세우고 위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음해할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을 비유한다. 1939년 스탈린의 60세 생일 경축연에서 마오쩌둥이 '스탈린은 중국의 벗이다'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이 자리에서 마오는 입으로는 중국을 동정한다고 하면서 침탈의 기회만을 노리는 제국주의 국가들을 '이임보와 같은 구밀복검의 친구'라고 비유했다. 입으로는 새벽배송 노동자의 건강을 챙기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뱃속에는 통제를 벗어난 노조를 손보려는 속셈을 품었다고 의심받는 민노총의 행태가 딱 그러해 보인다.

아직까지 민노총의 반박이 나오지 않는 걸로 봐서 쿠팡 택배노조의 폭로는 사실로 굳어지는 모양새다. 설령 어떤 반박이 있을지라도 민노총이 그동안 전체 노동자의 권익보다는 고용 세습을 요구하는 등 대기업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소위 '노동귀족'들의 기득권 강화를 위해 힘써 온 이력을 보면 쿠팡노조의 주장에 힘이 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설령 과로사의 위험이 있을지언정 새벽배송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절박한 심정을 등 따습고 배부른 노동귀족들이 알기나 할까?

노동자의 과로사 문제는 우리사회가 해결해야 할 사회적 현안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민노총이 진정 노동자의 건강권 개선을 바란다면 새벽배송만 콕 찍어 금지에 나설 게 아니라 야간근무 직종 전반에 대한 면밀한 실태 조사를 하고 이에 입각한 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옳다. 올해 상반기 '일하는 기혼여성'의 64.3%는 유자녀 취업자, 즉 워킹맘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100만명이 넘는 민노총 조합원 중에도 맞벌이 부부나 워킹맘들이 상당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택배기사들의 건강이 염려되어 새벽배송을 이용 안 하나?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불현듯 이는 궁금증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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