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침묵 일색' 사외이사가 변하고 있다

  • 정경희 유니코써치 전무

정경희 유니코써치 전무
정경희 유니코써치 전무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기업 이사회는 '거수기'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실제 한 조사에서는 상장 기업의 사외이사들이 이사회 안건에 모두 찬성한 비율이 95.3%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에는 안건 대부분이 경영진과 사전에 조율된 상태로 상정됐고, 반대표를 찾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이런 환경 때문에 사외이사들의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견제 역할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이사회 풍경은 분명 달라지고 있다. 사외이사들이 실질적인 논의에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발언하기 시작한 것이다. 감사·보상·ESG위원회 등 소위원회 활동이 전문화되면서 지원 부서 임원들이 준비해야 하는 자료도 예전에 비해 훨씬 늘어났다. 한 임원은 “과거에는 정기 보고 수준으로 충분했지만 지금은 ESG, 디지털 전환, 글로벌 규제 변화 등 훨씬 폭넓은 이슈까지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외이사의 적극적 참여는 기업 내부의 업무 방식과 준비 수준까지 바꾸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다섯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규제의 강화다. 상법 개정과 금융감독원의 모범규준 개정으로 감사위원 분리 선출, 이사회 활동 공시 강화, 이사 책임 확대가 이어졌다. 최근에는 이사회 운영의 투명성과 지배구조 강화를 위한 제도화 움직임이 본격화하며 사외이사 활동에 대한 기대도 높아지고 있다.
 
둘째, 책임 리스크의 현실화다. 주주대표소송과 감독 당국의 제재는 더 이상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적 위험으로 다가오고 있다. 글로벌 일부 판례에서는 이사 개인의 책임을 직접 묻는 사례가 나오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내부통제 미흡이나 ESG 관련 사안이 점차 이사회의 관리 책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셋째, 이사회 구성의 다양화다. 과거 재무·법률 중심에서 벗어나 ESG, 디지털, 글로벌 전문가들이 합류하면서 논의의 폭과 깊이가 달라졌다. 이들은 단순히 보고를 받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이끈다.
 
넷째, 투명성 요구와 외부 시선이다. 지배구조 보고서 공시는 2019년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부터 의무화되었고, 이후 자산 5000억원 이상 기업으로 확대됐다. 금융당국은 2026년부터 전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로 대상을 넓힐 예정이다. 이사회 운영과 발언 기록이 시장과 주주에게 투명하게 드러나는 환경에서, 발언 없는 이사회는 더 이상 신뢰를 얻기 어렵다.
 
다섯째, 지원 조직의 변화다. 금융권에만 국한되던 이사회 사무국은 이제 지주사와 대기업으로 확산하고 있다. 전담 인력과 예산을 갖춘 사무국은 사외이사가 경영진 눈치를 보지 않고 자료를 요청하거나 안건을 검토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이는 사외이사가 ‘누구냐’보다 ‘어떻게 활동하느냐’를 결정짓는 핵심 인프라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5년 은행 및 금융지주에서 외부 기관 이사회 평가를 도입한 곳이 전년보다 6곳 늘었다. 내부 설문에 그치던 평가가 외부 검증으로 확대하며, 그 결과는 지배구조 보고서를 통해 공개된다. 또한 KOSPI200 기업 이사회 안건의 성격을 보면 사업·경영, 인사, 특수관계거래 등 핵심 사안이 꾸준히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단순 보고가 아니라 기업 전략과 리스크 관리의 중심에 이사회가 놓이고 있다는 의미다.
 
최근의 변화는 방향이 분명하다. 사외이사의 발언이 늘고, 지원 조직이 정비되며, 평가와 공시가 강화되고 있다. 무엇보다 발언의 양을 넘어 질문의 질과 논의의 깊이가 담보될 때, 이사회는 실질적인 거버넌스의 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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