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남긴 말이다. 장소, 날씨, 몸 상태 등 하나하나가 모여 '분위기'를 만든다는 의미다. 영화도 마찬가지. 그날의 기분, 나의 경험이 영화의 '평가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최씨네 리뷰'는 필자의 경험과 시각을 녹여 관객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다. 조금 더 편안하고 일상적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영화 '구원자' [사진=(주)마인드마크]
모든 세계에는 균형이 존재한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얻는다면 다른 누군가는 무언가를 잃는다. 인간은 그 단순한 진리를 알면서도 끝없이 기적을 구한다. '구원자'(감독 신준)는 그 욕망이 만들어낸 균열을 응시한다. 축복의 땅이라 불린 오복리에서 시작된 한 가족의 기적은 곧 누군가의 불행으로 이어지고 영화는 그 불편한 등가의 법칙 속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묻는다.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을 뻔한 영범(김병철 분)과 선희(송지효 분)는 회복을 위해 '축복의 땅'이라 불리는 오복리로 이사를 온다. 그러나 이사 후 의문의 노인을 만난 뒤 기적처럼 걷지 못하던 아들 종훈이 다시 일어서게 된다. 가족에게 찾아온 놀라운 기적의 순간, 그와 동시에 이웃 춘서(김히어라 분)의 아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불행이 닥친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복리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점점 섬뜩한 균형의 법칙으로 변해가고, 춘서는 자신에게 닥친 저주가 영범 가족과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 '구원자' [사진=(주)마인드마크]
영화는 '기적과 저주가 등가교환된다'는 설정을 통해 인간이 신의 질서를 넘보는 순간 벌어지는 균열을 서늘하게 응시한다. 제목 '구원자'는 그 자체로 아이러니다. 구원은 축복의 언어이지만, 이 영화 속에서 그것은 동시에 파멸의 문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손길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재앙의 시작이다. 결국 '구원자'는 초월적 존재가 아닌, 기적을 욕망하는 인간 그 자체를 가리킨다.
신준 감독은 오컬트 장르의 전형을 과감히 비켜간다. 귀신도, 악마도 등장하지 않는 그의 세계에서 공포의 근원은 초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다. 민트색 창고문, 점차 붉어지는 색감, 까마귀의 시선으로 이어지는 카메라 워크는 '균형이 깨진 세계'의 불안을 시각화하며 현실 속 질서의 균열을 드러낸다. 특히 오복리는 영화의 무대이자 상징이다. 한때 '기적의 마을'로 불렸지만 지금은 모두가 기피하는 땅. 감독은 이 공간을 통해 '구원의 땅이 곧 재앙의 땅이 되는 아이러니'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며,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신의 균형 붕괴를 차갑게 응시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구원자’의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완성하는 축이다. '영범' 역의 김병철은 신념과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가장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선희' 역의 송지효는 믿음과 욕망의 경계에 선 인물로 신앙이 욕망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차분히 밀고 나가며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불안을 체현한다. '춘서' 역의 김히어라도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생존의 끝자락에서 폭발하는 본능의 에너지를 쏟아내며 세 인물의 감정선을 교차시키는 축으로 작동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발견은 김설진이다. 현대무용가로서의 신체 감각을 스크린 안으로 옮겨온 그는 언어보다 몸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형이상학적 존재를 형상화해 관객들의 불안감을 극대화 시킨다.
영화 '구원자' [사진=(주)마인드마크]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의 파동은 거세게 몰아친다. 기적의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은 다소 급격하게 전개되지만, 초반의 정적과 대비를 이루며 강렬한 긴장감을 완성한다. 감독은 그 과열을 통해 결국 하나의 결론에 다다른다. 기적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잔혹한 형태의 구원이라는 것. '구원자'는 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비추며, 그 믿음과 욕망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불가항력의 공포를 날카롭게 새긴다.
'구원자'는 오컬트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영화다. 신의 질서 앞에서 무력한 존재이자, 그럼에도 끝내 구원을 갈망하는 존재. 그 모순적인 욕망을 가장 현실적인 공포로 끌어올린다. 누군가의 기적이 나의 재앙이 되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영화가 던진 질문은 스크린이 꺼진 뒤에도 관객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린다. 11월 5일 개봉. 러닝타임 110분 관람 등급 15세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