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양자외교 승리 vs 다자외교 패배

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이병종 숙명여대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지난주 개최된 경주 APEC 정상회담은 한국에 몇 가지 선물을 안겨주었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 관세 및 투자에 관한 양보를 얻어냈고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에서는 “양국관계의 전면적 복원”이라는 성과가 있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의 다카이치 새 총리와도 만나서 양국의 우호적 관계 지속을 확인했다. 국내적으로는 외교 치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 즉 APEC이라는 다자 회담을 개최한 의장국으로서 국제적으로 한국 정부가 과연 그 역할을 다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APEC이 지향하는 역내 자유무역에 대한 어떠한 의미 있는 약속도 얻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9년 호주에서 21개 회원으로 APEC이 출범한 이래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자유롭고 개방된 무역 및 투자”는 이 회담의 금과옥조와도 같은 원칙이다. 이런 원칙 하에 APEC은 지난 36년간 역내 평균 관세율을 17%에서 5% 미만으로 낮추는 성과를 보였다. 역내 무역량은 회원국 전체 무역량의 50%에서 3분의 2 수준으로 상승했다. 그러나 회의 마지말 날 채택된 경주 선언에서는 “건강한 무역과 투자가 아시아 태평양 지역 내 성장과 번영에 필수적 (robust trade and investment are vital to the growth and prosperity of the Asia-Pacific region)”이라고만 밝혔을 뿐 자유무역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물론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가 있었다. 선언문 최종 문안이 나오는 과정에서 베선트 미 재무장관이 이 문구에 반대했다는 보도이다. 1기에 이어 2기에서도 관세 등 무역 장벽을 무기로 전 세계를 압박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다자 회담에서 한국뿐 아니라 중국과도 양자 회담을 통해 무역 현안에 관한 담판을 지었다. 세계무역기구(WTO) 등 다자적 국제 무역 질서가 미국의 경제를 망치고 교역국의 배만 불려주었다고 주장하는 그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오직 양자 간 일대일 협상만이 해결책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강경한 미국의 입장에 비춰볼 때 개최국 한국의 역할에 한계가 있었던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국경 없는 자유로운 무역을 통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나라 중 하나인 한국이 APEC의 기본 가치인 자유무역을 문서로나마 수호하지 못한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최소한 글로벌 리더십을 추구하는 중견국으로서 선언문에 자유무역을 포함시켜야 할 국제적 책무가 있었다고 본다. 양자 회담에서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의제를 선정하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개최국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 가능한 내일: 연결, 혁신, 번영 (Building a Sustainable Tomorrow: Connect, Innovate, Prosper)”이라는 거창한 구호로 개최된 이번 회의에서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AI 장관회의를 통해 AI 협력을 핵심 의제로 다루었고 선언문을 통해 “AI의 잠재력을 활용하여 회원국 간 경쟁력을 높이고 공동의 도전을 해결하는 데 기여할 것”을 합의한 바 있다. 또한 고용노동장관회의에서 한국이 제안한 ‘APEC 지속가능한 일자리 포럼’ 신설에 합의하는 등 노동 시장의 구조를 재편하고 있는 인구 구조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역내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선언문에는 파격적으로 문화 산업에 대한 문구도 포함되었다. 즉 “APEC 회원 간 문화 및 창조 산업에 있어 대화와 협력이 지역의 경제 발전에 기여할 것 (dialogue and cooperation on Culture and Creative Industries among APEC members will contribute to economic growth in the region)”이라는 문구를 통해 한국이 강점으로 내세우는 문화산업의 국제적 확산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대중문화교류위원장인 JYP 엔터테인먼트의 박진영 대표는 시진핑과의 대화를 통해 중국 내 한한령을 해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APEC은 결과적으로 무역 및 투자에 관한 다자회의이다. 본질과 핵심을 비껴 나간 경주 회담이 향후 국제적으로 후한 평가를 받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자유무역을 원하는 중국 등 신흥 개발국과 규제 보호 무역을 원하는 선진국 미국 간의 첨예한 대립을 재확인한 장소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과의 역사적인 정상회담 장면만이 뇌리에 남게 될 것 같다. 거기서 개최국 한국은 회의를 큰 사고 없이 무난하게 진행한 점은 인정받겠지만 진정한 다자회의 주최자로서의 존재감은 인정받기 어려울 것이다.

높은 비용과 번거로운 준비 과정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대형 다자회의를 주최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하고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2024 리우 G20 정상회의 선언, 2015년 파리 기후 협정, 1997년 교토 기후 의정서 협정 등은 국제 사회에 큰 획을 그은 다자 정상 회담으로 기억된다. 의미있는 결과물을 도출하기 위한 개최 국가의 능력이 인정받는 계기였다. 2025 경주 회담은 과연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인 국제 무역 질서에 영향을 미친 회담으로 기억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정국 운영에 반대하는 'No Kings' 운동이 미국에서 확산함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으로부터 금으로 된 왕관을 선물로 받고 즐거워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으로 기억될까?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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