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빛 비행선 ‘취약할 의향–메탈라이즈드 벌룬’을 타고 착륙한 전시 ‘이불: 1998년 이후’는 취약한 우주다. 흘러내리는 듯한 거울 파편들로 이뤄진 '태양의 도시 II'로 '사이보그 W6', '무제(아나그램 레더 #11 T.O.T.)', '오바드' 등 이불의 작품이 여기저기 반사되며 하나였다가 둘, 셋이 되고 흩어진다.
온 신경을 시각에 집중하고 우주를 탐색하면, 구석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둠칫둠칫 리듬에 몸을 맡겨 만나게 되는, 냉장고처럼 생긴 노래방 '속도보다 거대한 중력 I'은 말한다. "적어도 이 짧은 순간만큼은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 마음껏 노래하세요."

노래방의 안내에 따른다. 눈을 감고 철없는 짝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가장 순수했던 어린 날의 환희와 절망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소년 혹은 소녀를 생각하며 연관된 추억의 노래를 생각한다. 이제 눈을 뜨고 노래 목록에서 그 곡을 찾는다.
내 선택은 빅 마운틴의 ‘베이비, 아이 러브 욜 웨이(Baby, I Love Your Way)’. “우, 베이비 아이 러브 욜 웨이~ 서든리 더 데이 턴스 인투 나잇, 파어웨이 프롬 더 시티~(Suddenly the day turns into night. Far away from the city~)”
어느새 낮에서 밤이 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가장 순수했던 과거로 돌아간다. 노래방의 문을 열고 우주로 나오는 순간,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나’가 보인다. 소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겹친 ‘나’가.
리움미술관이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불의 대규모 서베이 전시 ‘이불: 1998년 이후’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지난 30년간의 작업을 선보이는 국내 첫 대규모 전시다. 조각, 대형 설치, 평면, 드로잉과 모형 등 150여 점을 볼 수 있다.

심연으로 내려간다
“‘나는 저 심연으로 내려가야 한다. 저녁마다 바다 저편으로 떨어져 하계(下界)를 비추어 주는 그대처럼, 그대 넘쳐흐르는 별이여! 나는 그대와 마찬가지로 몰락해야 한다. 내가 저 아래로 내려가 만날 사람들이 말하듯이. (중략) 차라투스트라는 다시 인간이 되고자 한다.' 이렇게 하여 차라투스트라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민음사 (12쪽)우주와도 같은 블랙박스 공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서히 내려가면, 과거와 현재, 미래가 뒤엉킨 지상 세계 ‘그라운드 갤러리’가 펼쳐진다. 이곳의 작품들은 단순히 시간 순서상으로 배열한 게 아니다.

작가 이불은 지난 1일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선택'을 말했다. “과거는 지나간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잊히는 것도 아니에요. 과거란 항상 현재로 불러들여 오는, 그 무한한 반복을 통해서 우리는 움직이고 있죠. 그렇기에 제가 끊임없이 불러들이는 과거와 현재, 과거에 꿈꿨던 미래의 모습들을 (그라운드 갤러리에) 그냥 펼쳤어요. 관객이 어떤 것이든 선택하고, 어떤 길이든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요.

엎치락뒤치락
그라운드 갤러리에서는 2005년 이후 전개된 ‘몽그랑레시(Mon grand récit)’ 연작이 전시의 중심을 이룬다. 개인과 집단의 기억, 역사의 파편들, 다양한 사회문화적, 정치적 요소가 뒤섞인다.
거울과 조명으로 이뤄진 미로 ‘비아 네가티바’ 안을 헤매며 산산 조각난 허상의 ‘나’와 마주하며 출구를 찾아 헤매고, 마치 동굴과도 같은 새까만 ‘벙커’에서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가도 혼란스러운 소리에 밖으로 나가게 된다. 벙커 밖에서 마주한 것은 과거와 현재다. 박종철 열사가 신음했을 검은물이 담긴 욕조와 백두산을 접목한 ‘천지’는 압제와 분단의 역사가 뒤섞였다. '천지'의 고요한 수면 위로 허공에 매달린 스턴바우와 이 땅에 발을 딛고 선 이의 얼굴이 비친다. '오바드 V'에서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인간사를 볼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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