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원재 논설고문]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현재 경제 상황이 너무 어렵기에 정부의 부담을 민간에 떠넘기는 증세를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며 증세에 반대했다. 이 대통령이 평소 경기 부양과 복지 확대를 위한 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한 터라 필요한 재원을 증세 없이 어떻게 조달할지 궁금했다.
7월 31일 발표된 정부의 세제개편안은 법인세와 주식 거래 관련 세금의 인상을 중심으로 증세 기조를 분명히 했다.
법인세 최고세율을 24%에서 25%로 높이고 0.15%였던 증권거래세는 0.20%로 올리기로 했다. 법인세는 3년 전, 증권거래세는 2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두 세금의 인상으로 연간 8조원, 향후 5년간 누적으로 35조6000억원의 세수가 늘어난다는 게 기획재정부의 계산이다.
정부 출범 두 달 만에 증세에 나섰다는 이유로 이 대통령이 세금 정책에서 말바꾸기를 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본질을 벗어나는 것이다. 후보 시절의 경제관과 집권자의 판단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라 살림 형편을 살피다 보니 써야 할 돈은 많은데 들어올 돈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절감했을 것이다. 국정기획위원회가 제시한 123대 국정과제를 이행하려면 210조원이 필요한데 지출 구조조정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세금은 정권의 철학과 정체성을 반영하는 핵심 장치다. 증세와 감세 중 어느 쪽을 택할지는 정권이 추구하는 가치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이재명 정부의 증세에 대한 태도는 당당하지 못하다. 법인세 세율을 올렸지만 책임 있는 당국자 입에서 증세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이전 정부 정책의 원상회복’ ‘부자 감세의 정상화’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얼버무리고 있다.
한국의 법인세 인상은 주요국들이 자국 기업의 부담을 줄이고 투자와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세금을 깎아주는 것과 다른 방향이다.
구윤철 경제부총리는 “윤석열 정부가 감세 정책을 통해 세금을 깎아주면 기업이 투자를 하고 선순환 구조로 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로 보면 성장도, 소비도, 투자도 줄었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세금을 낮추면 고용과 경기에 도움이 된다는 낙수(落穗) 효과를 기대했는데 감세에도 경기 침체와 투자 부진이 계속돼 세율을 다시 올린다는 것이다.
성장률 하락과 소비 감소, 투자 위축이 감세 탓은 아니다. 세율을 올리면 세수가 증가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은 맞지만 기업 이익의 총량이 늘지 않으면 인상 효과는 미미하다.
한국의 법인세 세수는 경기 변동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대체로 연간 70조~80조원 수준을 오갔다. 세율이 25%이던 2018년과 2019년 세수가 70조~72조원인데 24%로 낮춘 2023년은 오히려 80조원을 넘었다.
지난해 62조원으로 쪼그라든 세수는 세율 인하 영향보다는 국내외를 동시에 덮친 전례 없는 경기 침체로 법인세 과세의 근거가 되는 기업 이익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기업 실적에 따라 변동성이 커지는 법인세 징수액을 과세표준에 세율을 곱하는 식으로 예측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올 상반기 매출액 상위 국내 500대 기업의 영업이익은 1년 전보다 5.9%(6조5694억원) 증가했지만 SK하이닉스반도체를 빼면 1조7294억원 줄었다. 미국발(發) 관세전쟁과 중국의 급성장, 미래 먹거리 산업 창출 실패로 고전하는 한국 기업의 현실이 고스란히 투영된 수치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선점 효과를 누리는 ‘SK하이닉스 착시’를 빼면 실제로는 기업들의 내상(內傷)이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법인세 세수는 기업의 수익성, 업종별 변수, 글로벌 무역 환경의 변화, 노사 관계, 신제품 개발 및 출시, 경쟁국 동향 등 다양한 변수가 맞물려 있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증세를 택했으면 경영 환경을 개선해 세수 확대 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짜야 하는데 상충되는 정책과 메시지로 세율 인상의 효과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 대통령은 “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협조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지만 기업들이 받아든 것은 상법 개정에 이어 더 센 상법 추진과 노란봉투법 강행 등 경영을 옥죄는 입법 드라이브다. 한·미 관세협상 타결로 기업들의 투자 부담은 커지고 이익을 내기는 더 힘들어졌다.
잠재성장률이 1%대로 떨어지고 과도한 기업 규제, 강성 노조, 중국의 추격 등으로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면 세수 증대는 기대할 수 없다. 기업 경쟁력이 훼손되고 수익성이 떨어지면 아무리 세율을 올려도 세금은 늘지 않는다.
어려운 숙제는 미뤄두고 조세 저항 우려가 작은 법인세에 초점을 맞춘 것도 당당하지 못하다.
국세 가운데 비중이 가장 큰 소득세는 다자녀가구 소득공제한도 확대 같은 일부 조정에 그쳤다. 디지털 경제 등 새로운 영역의 세원(稅源) 발굴, 소득공제의 세액공제 전환, 면세 제도 개선 등 과세 기반을 넓히는 근본적인 개편은 시도하지 않았다.
근로소득 공제 방식을 바꿨다가 월급생활자들의 반발에 부닥쳤던 박근혜 정부의 ‘세정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았다면 안전한 선택이지만 개인과 달리 표가 없는 법인에 세금 부담을 떠넘겼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최근 증시를 뒤흔든 양도세 대주주 논란은 세제개편에도 철학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상장주식의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을 종목당 보유액 50억원에서 10억원 이상으로 강화했다가 개인투자자들이 반발하고 주가가 떨어지는 등 파장이 커지자 뒤늦게 백지화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증시에 미칠 영향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법인세 인상처럼 ‘과거 정부 정책의 원상회복’이라는 단순 논리로 다뤘다가 빚어진 정책 실패다. 증시 세제개편의 목적이 세율 인상을 통한 세수 확보인지, 증시 활성화를 위한 세제 지원인지, 부자감세 철회를 통한 공정과세 실현인지 명확하지 않아 생긴 일이다.
이번 세제개편안은 이재명 정부의 조세정책 방향을 가늠할 첫 번째 발표라는 의미가 무색하게 논리적 완결성과 설득력을 갖추는 데 실패했다. 어떤 원칙과 논리로 증세를 택했는지, 증세로 인해 민간 활력이 떨어지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
증세에 대한 기획재정부의 공식 표현은 ‘법인세율 환원’ ‘증권거래세율 환원’ ‘주식 양도세 대주주 기준 환원’이다. 본래 상태로 돌려놓는다는 뜻인 환원(還元)이 증세 또는 세금 인상의 대체어로 쓰인 것이다.
‘넓은 세원, 낮은 세율’이라는 세금의 기본 원칙을 지키려 고심한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기업의 부담을 키우는 증세를 결정하기 전에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검토했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세제개편안의 완성도 부족은 조세정책에 대한 납세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미봉책으로 의심하는 잠재적 납세자들은 세금과 관련한 정부 발표를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부와 여당이 여러 차례 “세금으로 집값을 잡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히고 있지만 부동산 시장에서는 보유세 인상의 상황별 시나리오까지 등장했다. 주택 가격이 불안정해지거나 세수 부족이 심각해지면 이전 정권에서 완화한 종합부동산세 기본 공제액과 공정시장가액비율 등을 ‘보유세 정상화’ 명분으로 다시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어떤 경우라도 세금을 쓰지 않겠다는 것은 굉장한 오산"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보유세 인상 우려가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이재명 정부의 실용주의 경제는 세금 정책에서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경기 부양과 인공지능(AI) 등 신산업 투자, 형편이 어려운 계층에 대한 복지 확대 등 펼치고 싶은 정책이 많으니 여기에 쓸 돈을 확보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 그러려면 기업 경쟁력을 키워야 하는데 노조 등 전통적 지지층의 요구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가치가 상충되는 목표를 모두 이루려다 보면 정책과 정책이 충돌하고, 이율배반적인 정책이 등장해 처음 의도와 다른 결과가 나올 위험이 커진다.
조세는 경제정책 중 국민의 체감도가 가장 높은 영역이다. 특히 세금을 더 걷는 증세는 납세자인 민간의 담세 능력까지 살펴야 하기 때문에 세금을 깎아주는 감세보다 난이도가 높다. 바람직한 증세 정책은 세수를 늘리면서 기업이 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경제적 활력을 키우는 것이다.
걷기 쉬운 세금만 늘리는 선택적 증세는 당장은 편하지만 지속 가능하지 않다.
박원재 필자 주요 이력
▷핀란드 알토대 경영학석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경제부장 ▷동아닷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 ▷경성대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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