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승찬 (사)중국경영연구소장/용인대 중국학과 교수]
중국 지방정부 초청 기조강연과 중국 경제 현황, 시장 조사차 최근 쓰촨성 청두, 충칭, 상하이 등 도시를 돌며 다양한 기술혁신의 변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와 함께 많은 현지 공무원, 기업인 및 중국인을 인터뷰했다. 급변하는 중국 시장을 이해하기 위해 매번 가는 출장이었지만 이번은 남달랐다. 출장 내내 보고 들으면서 항상 등장하는 2개의 키워드가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중시(中试)’와 ‘도시 간 협업 혁신생태계(生态链) 구축’이었다.
첫째, ‘중시’는 파일럿 테스트 또는 중간테스트를 의미하는 중국어 표현이다. 신제품, 신기술, 신공정 등을 상용화하기 전에 실제 환경과 유사한 조건에서 프로토타입을 소규모로 제조해 테스트하며 문제점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단계를 말한다. 이미 중국 제조생태계에서 중간테스트는 다양한 영역에서 빠르게 정착되고 있는 듯하다.
청두 첨단산업단지가 운영하고 있는 ‘스마트 하드웨어 중간테스트 플랫폼’이 대표적인 사례다. 제한적이고 분산된 중간테스트 기관과 열악한 창업 제조환경에 있는 한국 상황과 달리 청두는 산업별·업종별로 체계적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청두 중간테스트 플랫폼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 산관학이 서로 유기적으로 작동되는 생태계다. 1단계는 초기 콘셉트 검증단계(Proof of Concept)로 제품의 아이디어가 실제 구현 가능한지를 테스트하는 과정으로 일반적으로 대학 및 연구기관의 과학기술 성과(R&D)가 여기에 해당된다. 2단계는 전문가로 구성된 기술적 검증(概念验证) 단계이다. 초기 아이디어나 과학기술 성과가 중간 테스트 플랫폼에 들어오면 전문 검증단이 타당성 분석, 기술검증 테스트(EVT), 제품 디자인 수정작업이 진행된다. 프로토타입 개발에서 기술적으로 구현된 제품 기능이 실제로 작동되는지를 테스트하는 과정이다. 3단계는 프로토타입의 중간테스트 검증(中试验证) 단계로 설계 완성도 검사(DVT), 제품양산 적합성 검사(PVT) 등 작업이 진행된다. 특히 양산 적합성 검사는 대량생산의 첫 번째 단계로 초기 소량으로 생산해 수율(완성품 비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으로 대량생산을 위한 공정과 품질 시스템을 실제로 운영하고 검증하는 단계다. 3단계부터 중간테스트 플랫폼이 기업의 생산·운영자금과 대량생산 자금 펀딩을 위해 관련 엔젤투자, 벤처캐피털까지 직접 나서 연결시켜준다. 마지막 4단계는 대량생산(量产上市)으로 중간테스트 제품생산 원가 절감과 가격경쟁력 제고를 위해 제품에 필요한 회로기판∙소재∙부품을 만드는 제조공장까지 플랫폼이 직접 매칭해준다. 우리가 각종 규제와 부족한 혁신생태계 속에 우왕좌왕하는 사이 중국 제조혁신의 성장은 무서울 정도다. 낮은 품질의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기존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중국의 변화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둘째, 도시 간 융합과 협업, 분업을 통한 기술혁신생태계의 구축이었다. 필자는 현지 공무원의 소개를 통해 상하이 쑹장구(松江區)에 위치한 ‘장강삼각주 G60 과학혁신 회랑 건설’ 계획전시관을 방문했다. 일반 대중은 참관하기 어렵고 정부 고위관료 및 중요한 외국 전문가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개되는 전시관이었다. 장강삼각주는 장강이 흘러가는 상하이, 장쑤성, 저장성 등 지역을 일컫는 초광역권 개념이다. G60은 상하이에서 윈난성 쿤밍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 구간을 의미한다. ‘장강삼각주 G60 과학혁신회랑’은 G60 고속도로를 따라 상하이 쑹장구를 시작으로 저장성 자싱(嘉兴)-항저우(杭州)-후저우(湖州)-진화(金华), 장쑤성 쑤저우(苏州), 안후이성 쉬안청(宣城)-우후(芜湖)-허페이(合肥)의 9개 도시로 구성된 첨단산업 생태계 구축을 위한 기술 커넥티드 협력권이라고 볼 수 있다. 2018년 장강삼각주 통합 발전계획이 국가전략으로 승격된 후 중앙정부 차원의 2019년 12월 장강삼각주 지역통합 발전계획, 2020년 12월 장강삼각주 과학기술혁신 공동체 건설을 통해 장강삼각주 지역은 중국 경제 및 과학기술혁신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G60 과학혁신 회랑이 중국 핵심첨단산업의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21년 4월 과학기술부, 공업정보화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등 6개 부처 공동으로 ‘장강삼각주 G60 과학혁신 회랑 건설 방안’이 발표된 지 4년이 지났다.
G60 과학혁신회랑은 AI, 반도체, 제약바이오, 첨단장비, 신에너지, 신소재, 양자정보 등 진입장벽이 높은 최첨단 기술인 하드코어 기술(Hard & Core Technology) 연구개발과 관련 기업 육성이라는 명확한 설립 목적을 제시한 바 있다. 첨단산업의 기술자립과 발전을 위해 9개 도시 간 과학기술혁신과 제도혁신을 통해 세계적인 과학기술혁신 클러스터로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9개 도시에서 파견된 담당 공무원이 상하이 쑹장구 사무실에 함께 근무하면서 기술-정책-자금-인프라 방면에서 9개 도시 간 협업과 개방적 분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2024년 G60 과학혁신 회랑의 GDP 총액이 1조2700억 달러로 세계 18위 경제 규모안 네덜란드(1조1157억 달러)보다 많다. G60 회랑 내 하이테크 기업 수도 2018년 1만6000여 개에서 2024년 5만9000여 개로 늘었고, 그중 상하이거래소 기술창업주 시장인 커촹반에 상장된 기업 수가 119개로 중국 전체에서 20% 이상 차지하고 있다. 이미 회랑 내 48개 스타트업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해 중국 전체 중 14%를 차지할 정도다.
G60 과학혁신회랑 내 AI, 신소재, 첨단장비, 신에너지, 제약바이오, 반도체 등 핵심 기술별로 9개 도시 간 제조생태계는 매우 구체적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첨단기초소재, 핵심전략소재와 첨단신소재로 구분되는 신소재 산업은 각 소재 영역별로 9개 도시 클러스터 특성에 따라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된 우수한 연구개발기관과 제조기업들 간 교류와 협력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G60 과학혁신회랑의 정부 플랫폼에서 상호 경쟁과 협업, 분업을 통해 기술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각 도시별로 자체적인 혁신 생태계 조성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 각 도시의 혁신자원을 통합해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각 지역 특화형 클러스터, 소부장 단지의 장점과 혁신 인프라를 공유하고 분업을 통해 국가급 첨단산업 혁신플랫폼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중국 제재가 심화될수록 중국의 기술자립도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제조선진국인 한국의 위상이 점점 위태로워지고 있다. 우리도 부랴부랴 올해부터 처음 메가시티 협력 첨단산업 육성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초격차 첨단산업과 연계한 메가시티 협력산업의 밸류체인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획기적이고 개방적인 제도혁신과 규제개혁, 선택과 집중에 따른 초격차 전략이 시급해 보인다.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박승찬
중국 칭화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한민국 주중국 대사관에서 경제통상전문관을 역임했다. 미국 듀크대(2010년) 및 미주리 주립대학(2023년) 방문학자로 미·중 기술패권을 연구했다. 현재 사단법인 한중연합회 회장 및 산하 중국경영연구소 소장과 용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더차이나> <딥차이나> <미중패권전쟁에 맞서는 대한민국 미래지도, 국익의 길> <알테쉬톡의 공습> 등 다수가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