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축구다①]빅블러와 가짜9번 시대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입력 : 2018-06-19 09:07수정 : 2018-06-19 09:23
월드컵스페셜 - 포지션의 구분이 사라지는 세상
# 빅블러, 거대한 흐릿함이 덮치다

'빅블러(Big Blur, 거대한 흐릿함)'란 말을 맨처음 쓴 사람은 기업경영 컨설턴트인 스탠 데이비스(Stan Davis)다. 1999년 그의 저서 '블러-연결경제 내에서의 변화속도'에서 쓴 용어다. 빅블러는 정보통신기술이 고도화함에 따라 산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산업의 경계와 더불어, 상품과 서비스의 경계, 직업간의 경계 또한 흐릿해진다. 
 

[스탠 데이비스]



화폐를 예로 들면, 현금과 카드와 애플리케이션은 서로 넘나들기 시작하면서 관련 경제의 양상을 바꿔놓았다. 금융기관의 업무방식과 점포, 수익시스템, 인력 운용을 뒤흔들었다. 핀테크는 디지털 기술과 그것을 적용한 시스템의 급속한 발전에 부응하려는 금융계의 '디지털 최적화' 몸부림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블록체인 기반의 가상화폐 또한 갈수록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경제의 기반 속으로 파고든다. 

쇼핑은 어떤가. 백화점과 대형마트와 같은 오프라인 유통점을 중심으로 공고한 지위를 누렸던 쇼핑시스템은, TV 홈쇼핑과 온라인쇼핑의 공세에 스스로 디지털 유통자로 변신하거나 하이브리드 형태의 온오프 유통으로 활로를 모색한다. 전자상거래 업체가 유기농 체인점인 홀푸드를 인수하고 무인점포를 운영하는 것 또한 경계 파괴의 한 사례이고 검색업체였던 네이버가 온라인쇼핑으로 유통 강자가 되는 것 또한 비슷한 현상이다. 메신저 업체로 시작한 카카오가 택시 영업에 손을 대는 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결합을 의미하는 O2O의 일종이다. 음식배달앱도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사물인터넷은 제품 사이의 고유한 영역을 허물고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지니도록 하고 있다. 디지털 정보와 실물제품이 연결되면서 양자간의 경계가 사라진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제품이나 서비스 사이에서 일어났던 많은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과 판단과 결정을 대리하거나 중개하는 쪽으로 급속 진화하고 있다. 최근, 어린 아이가 엄마라는 말보다 아마존의 대화형 인공지능 블루투스인 '알렉스'란 말을 먼저 인지한다는 섬뜩한 뉴스가 등장했다. 오랫동안 상식처럼 여겨졌던 고유의 영역과 분류와 정체성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있다는 신호다.

산업의 여러 영역들이 빅블러를 겪게됨에 따라, 향후 곧 사라질 직업에 대한 불안 또한 점증하고 있다. 영역들이 통합되는 지점마다, 일자리 상실이 발생하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의 활용이 커질수록 인간의 역할이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 또한 만만치 않은 게 사실이다. 블러의 지점마다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혁명의 승자는 적고 패자는 많을 수도 있다. 최근 나온 영국영화 '2036 오리진 언노운'은, AI가 화성탐사 인간전문가를 부리는 팀장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격변과 편리와 불안이 공존하는 '빅블러', 축구에서 통찰을 찾는 건 어떨까?

# 가짜9번의 등장과 축구의 '빅블러'

축구는 포지션의 경기처럼 인식되어 왔다. 공격수는 골을 겨냥하고 수비수는 수비를 하고 미드필더는 공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역할 게임은 오랫동안 축구의 전략 전술의 모든 것이었다. 여기에 변화를 준 것이 멀티 플레이어라는 개념이다. 한 선수가 때에 따라 여러 역할을 소화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멀티플레이어가 수비수와 미드필더 역할을 동시에 해내는 것은, 선수 역량의 문제다. 두 개의 포지션을 맡을 만큼 뛰어나다는 의미다.

최근 들어 그 개념이 바뀐다. 포지션 자체가 파괴되거나 변형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제로톱'으로, 최전방의 공격수(포워드)가 없는 시스템이다. 제로톱의 경우, 최전방 중앙 포워드 대신, 가짜9번이 기용되는 경우가 많다. 가짜9번은 폴스나인(False Nine)이라고도 불린다. 9번은 전통적인 중앙공격수의 넘버이지만, 역할이 다르기에 이런 명칭이 붙었다.  폴스나인은 상대팀 수비수에 밀착하며 포지션을 지키는 전통적 역할을 하지 않고, 미드필드 깊숙이 내려온다. 
 

[리오넬 메시]



폴스나인의 미션은, 센터 수비의 혼란을 불러일으켜 공간을 만들어낸 뒤 공격진으로 불쑥 들어오는 다른 선수에게 공을 넘겨주는 일이다. 폴스나인은 최전방 공격수가 아니기에 공격수와 미드필더를 아우르며 포지션을 넘나들고 자유롭게 움직인다. 상대 수비를 끌고다니며 직접 득점을 하기도 하고 어시스트로 도움골을 주기도 한다. 침투와 드리블, 득점력, 패싱솜씨를 다 갖춰야 한다.

이 '하이브리드' 포지션의 미션은 미드필드 지역에서 공격권을 오래 소유하는 것을 돕는 일이다. 펄스 나인이 제대로 역할을 하는 경우, 상대팀은 미드필드를 운영할 숫자가 부족하고 수비수는 직접 마크할 대상이 분명치 않아 위치 선정에 혼란을 겪는다. 가짜9번은 포워드와 미드필더 사이의 경계를 허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진짜9번의 경우 키가 크고 몸싸움을 잘하는 선수가 맡지만, 가짜9번은 신체조건과 상관없이 패스를 잘하고 개인기가 능하며 전술적 판단이 빠른 친구가 적합하다. 이건 미드필더의 덕목이다. 그런데 가짜9번은 골 결정력까지 갖추고 있어야 하기에 포워드의 미덕도 필요하다.

폴스나인으로 손꼽히는 선수는 FC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다. 또 AS로마의 프란체스코 토티나 UEFA 유로2012에서 스페인팀의 세스크 파브레가스도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줬다. 가짜9번은 미드필더에 가까워진 포워드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는 다르게 포워드에 근접한 미드필더도 있다. 기본적으로 미드필더 역할을 해내면서도 빠른 템포로 최전방으로 돌입하거나 대담한 중거리 슈팅을 날려 포워드 뺨치는 득점을 올린다. 외국에선 '서포팅 스트라이커(지원 공격수)'라고 부르며, 국내에서는 미드필더와 스트라이커를 합쳐 '미들라이커'라고 호칭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미들라이커는 잉글랜드팀에서 활약했던 프랑크 램파드를 꼽는다.

포지션의 '빅블러'는 수비와 미드필드에서도 나타난다. 최근 축구의 흐름은, 수비 진영에서부터 공격이 펼쳐지는 '빌드업'(공세 전개)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아르헨티나 감독인 리카르도 라 볼페가 만든 '라볼피아나' 전법이 대표적이다. 백4 바로 앞에 자리잡은 수비형 미드필더(앵커맨)가 일시적으로 센터백 사이로 내려오는 전술이다. 바텀체인지라는 용어로도 쓰이지만, '앵커맨의 일시후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리카르도 라 볼페 감독]



최근 압박축구가 정교해지면서 중원에서의 압박이 치열해졌다. 가장 압박을 받는 자리가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이고 그 다음이 중앙 미드필더다. 수비형 미드필더는 두 포지션보다는 상대적으로 압박을 덜 받지만 아예 수비진으로 내림으로써 상대의 압박에서 효과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고 착안한 게 '라볼피아나'(라볼페의 방식)다. 라 볼페가 처음 시도했을 때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바르셀로나와 리버풀 등 유명 클럽팀들이 활용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신태용 감독도 국가대표팀에서 이 전법을 활용한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빌드업 때 수비 사이에 끼어있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스페인의 호셉 과르디올라 감독은 '인버티드 풀백' 시스템을 도입했다. 인버티드(inverted)는 반대로 뒤집는 것을 의미하는데, 물구나무 서기를 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풀백이 물구나무 서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 보통 풀백 시스템은 측면으로 넓게 벌려 사이드 라인을 따라 움직이지만 인버티드 풀백은 측면을 수비하다가 빌드업이 시작되면 중원으로 들어와 중앙미드필더 역할을 맡는다. 미드필드에서 숫자를 증강하는 묘책으로, 풀백에서 튀어나온 미드필드인 셈이다.
 

18일 월드컵 스웨덴 전에서 맹활약한 조현우 골키퍼.[연합뉴스]



어제 러시아월드컵 스웨덴전에선 조현우 골키퍼가 여러 번의 골 위기를 막아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골키퍼도 변신할 수 있다. 스위퍼 키퍼는 골키퍼와 필드 플레이어의 '빅블러'다. 길게 넘어오는 상대의 공격볼을 페널티 박스 밖으로 나와 적극적으로 차단하는 골키퍼다. 수문장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비수들과 함께 볼을 돌리며 빌드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역할을 맡는다. 바이에른 뮌헨의 마누엘 노이어의 패스 솜씨와 개인기를 떠올려 보라.

포지션 파괴의 원조는 리베로일지 모른다. 최후방 수비수이면서 기회를 타고 쭉 치솟아 올라 최전방 공격에 가담하는 전천후 저격수다. 2016년 타계한 바르셀로나 감독(네덜란드 출신) 요한 크루이프는 토털 사커 개념을 창안했다. 고정된 포지션을 파괴하고 모든 선수가 공격과 수비에 가담하는 시스템이다. 

왜 축구는 이토록 포지션의 경계를 흔들고 '하이브리드' 위치를 개발하는 데 고심을 해왔을까. 어떤 포지션이 정해지면, 고정관념이 생겨나고 그 포지션에 집착해 유연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느리고 둔해진다. 대형을 갖추고 전체를 운영하는 '그림'은, 처음엔 유용하지만 나중엔 그것이 약점이 되기 쉽다. 상대 또한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그림을 읽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허점을 활용하려 들기 때문이다.

축구의 빅블러는, 상대팀(적) 또한 끊임없이 진화하는 환경에서 새로운 생태계의 승자가 되기 위한 고민의 소산이다.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다양한 영역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지만, 디지털 혁신기에는 그런 분류와 체계들이 걸림돌이 된다. 혁신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 바꾸지 못할 포지션은 없으며, 새로운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깨지 못할 생각은 없다는 것을 축구 전략의 긴박한 역사는 말해준다. 왜 포지션을 파괴하는가.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축구가 단순하다고? 경제를 축구만큼 제대로 치밀하게 한다면, 나라가 연승하고 있을 것이다. 

                               아주닷컴 이상국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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