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이의 사람들]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의 아덴만 여명작전 이후 달라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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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이 객원기자
입력 2021-02-1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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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1월 15일 아라비아반도 예멘과 소말리아 사이에 있는 아덴만 인근 해역에서 해적에게 납치됐던 삼호주얼리호. 당시 삼호주얼리호를 이끌었던 석해균 선장은 해적들이 한국말을 모르는 것을 이용해 해군 최영함에 정보 전달을 하며 아덴만 여명작전의 성공을 이끌어낸 아덴만의 영웅이다.

작전 중 자신을 총으로 쏜 해적을 용서하기도 했던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덴만에서 피랍된 지 10년이 되는 지난 1월 15일, 진해에서 석해균 선장을 만나 아덴만 여명작전 이후 달라진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사진= 김호이 기자/ 바다의 사나이 석해균 선장. 그는 진해에 살고 있고, 해적에게 납치가 됐으며 이름에도 바다 해(海)가 들어간다]


Q. 어쩌다가 항해를 시작하게 됐나요?
A. 해군을 나왔는데 제대를 하고 나서 처음에는 일반 회사에서 근무를 했어요. 그 당시 부산에서는 외양선 타는 게 인기 직업이었거든요. 그래서 ‘나도 배를 한 번 타볼까‘라는 생각에 우연치 않게 해상 생활을 하게 됐어요. 선원에서 선장이 되기까지 12년 정도 걸렸어요. 선장은 누구나 한번쯤은 꿈으로 가져볼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권한이 많이 없어졌지만 제가 처음 선장이 됐을 때만 해도 삼권을 다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돈 벌면서 가보지 않은 곳을 가면서 새로운 걸 많이 보잖아요. 그래서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Q. 선원에 대한 로망과 현실은 어떻게 달랐나요?
A. 당시 해상 생활을 하면 돈을 많이 번다는 로망이 있었어요. 근데 2년 정도 지나니까, 이왕 시작한 거 최고가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막상 선장이 되고 보니까, 머리가 아프더라고요. 회사는 회사대로 어렵고, 제일 어려운 건 선원들을 콘트롤하는 것이었어요. 특히나 선원들은 더 거칠고, 조금만 신경을 안 쓰면 안전사고가 발생하거든요. 그래서 생각했던 것과 막상 해보는 건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요.

Q. 배에서 석해균은 어떤 선장이었나요?
A. 엄격하지만 선원들과 배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어요. 회사에서 선원들에 대해 부당한 요청이 있으면 바로 거절을 했어요. 보통 선장들은 회사에서 부당한 요청이 있어도 선원들 모아놓고 설득을 하는데, 나는 안한다고 해요. 그래서 조금 결단력이 강한 선장이죠. 선원시절에 함께 했던 선장은 권위적이어서 선원들과 대화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선장이 되면 다 같이 생활하는 선장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장이 돼서 새로운 선원들이 오면 모아놓고 ‘여러분들이 이제 이 배에 승선하는 이 순간부터 제일 중요한 건 동료들과 협심단결이 잘 되고 친하게 지내야 된다‘고 말해요. 그때부터는 주위에 어떤 상황들이 발생할지 몰라요.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순간에서 도와 줄 사람은 동료밖에 없거든요. 육지에서도 회사에서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도와줄 사람은 동료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동료와 잘 지내는 게 중요해요.

 

[사진= 김호이 기자]


Q. 선장님의 삶에서 아덴만 여명작전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일이 일어난 게 정확히 언제죠?
A. 2011년 1월 15일 현지시각 오전 7시 48분경에 해적들이 승선했어요. 당시 삼호주얼리호는 스리랑카로 향하고 있었어요. 오전 7시 30분쯤 선내 비상벨이 울렸다는 보고를 받았거든요. 그래서 위로 올라갔어요. 당시 근무자가 1등 항해사였는데 “선장님 해적이 있습니다”라고 보고를 해서 봤더니 이미 해적이 올라오고 있었어요. 해적이 올라오고 나서부터 긴장의 연속이었죠. 그때부터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Q. 당시 함께 한 사람들은 누가 있었나요?
A. 전 선원이 같이 했죠. 선장을 포함해서 21명이었거든요. 해적들은 다른 선원들은 상대를 안 했어요, 배의 규칙이 그러니까. 선장인 나만 콘트롤하면 된다는 생각에 무엇이든 나한테 요구하고, 안 들어주면 총으로 때려서 시달리게 하고, 죽이겠다고 총을 겨누고 그랬죠. 해적이 선장을 찾는데, 처음에는 겁나서 말을 안했어요. 근데 선원들이 다 입을 닫고 있는 상황에서 안 나올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선장이라고 하고 나갔어요. 그랬더니 해적들이 자기들이랑 합류하자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같이 갔어요.

0. 당시 해적과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A. 대화보다는 해적들이 나한테 계속 요구를 했죠. 근데 내가 거절을 하니까 문제가 생긴 거예요. 배를 고장냈거든요. 처음에는 배 자체 고장인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내가 고장을 냈다는 걸 알아버리고 총을 겨눴죠. 총을 6발 맞고도 살아난 건 기적이 아니라 정신력이라고 봐요. 총을 맞으면 자기도 모르게 정신줄을 놔버리잖아요. 우연치 않게 총을 맞고 처음에는 정신을 잃었다가 나도 모르게 정신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여기서 정신줄을 놓지 말고 병원까지만 가자, 그러면 나는 살 수 있다’하면서 자기 최면을 걸었어요. 병원까지 16시간이 걸렸거든요. 병원에 도착해서 한 명이 걸어오는데, 얼굴은 못 알아보고 의사가운을 입고 있는 것만 보여서 ‘저 사람이 의사다’라는 걸 직감했어요. 의사가 가까이 왔을 때 ‘아파서 못 견디겠습니다, 제발 진통제 좀 놔주십시오’가 내 마지막 말이에요.
 

[사진= 김호이 기자]


Q. 해적이 총을 겨누었을 때, 죽음의 문턱에서 들었던 생각은 무엇인가요?
A. 해적을 만나고 어떻게든 이 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배를 못 움직이면 소말리아에 못가잖아요. 제가 해적들이 겨누는 총살대 앞에 두 번을 섰거든요. 첫 번째는 엔진이 고장났다고 해서 시간을 끌었는데 3~4시간 지나니까 내가 거짓말한다는 걸 두목이 눈치챈 모양이에요. 소말리아에 빨리 가지고 하는데 "엔진 수리하고 있지 않냐"고 하니까 나보고 거짓말을 한다는 거예요. 거짓말 아니라니까 갑자기 “너 죽을래, 소말리아 갈래”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소말리아 가야죠. 그래서 겁주는 건가 하고 해적을 쳐다봤는데, 한편으로는 잘못하면 죽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도 '설마 쏠까'해서 쏘라고 했더니 바로 멱살을 잡고 밖으로 나가자는 거예요. 말 잘못했구나 싶더라고요.

근데 말은 이미 뱉었는데 수정하면 상대방이 믿지 않죠. 그래도 할 수 없이 끌려 나갔죠. 그러더니 또 총을 겨누면서 “갈래, 죽을래” 그러더라고요. 그때는 쏘라고 못하겠는 거예요, 잘못하면 죽으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다가 문득 학교폭력이 떠오르더라고요. 학교폭력은 당하는 애들이 계속 당해요. 근데 피가 나더라도 끝까지 달려들면 다시는 안 건드려요. 그래서 상대가 강하게 나올 때는 나도 강하게 나와야 된다 싶었어요. "쏘고 싶으면 쏴라, 그 대신 선장이 없으면 이 배는 못 움직이고 소말리아 못 간다"라고 했어요. 해적들은 배에 대해서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더라고요. 

Q. 총을 6발 쏜 건 언제죠?
A. 두 번째 총살대 앞에 섰을 때는 엔진을 고장 낸 상태였어요. 그것도 알아버린 거예요. 그래서 정말 많이 맞았거든요. 거의 실신 직전까지 갔는데, 다시 “소말리아 갈래, 죽을래” 그러더라고요. 근데 그때는 분위기랑 감정, 목소리가 완전히 달라서 여기서 거절하면 죽겠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여기서 만약에 손을 들어버리면 지금까지 한 게 헛일이 되는 거예요. 근데 희생 없는 명예는 없어요. 명예가 생기려면 희생이라는 뿌리가 있어야 돼요. 정 안되면 내 한 목숨 던지자는 생각으로 내 주장을 펼치니까, 끌려나가서 다시 총살대 앞에 섰어요. 이왕 죽으려고 마음먹은 거, 내가 해적한테 ‘쏴라’하는 것과 해적이 쏘는 건 다르잖아요. 그냥 "It,s up to you(너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하고 눈을 감아버렸어요. 모든 것을 포기하니까, 그동안 내가 살아 온 게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한참 시간이 지나고 눈을 떴는데, 안 쏜 거예요. 총을 쏘면 해적들도 골치가 아프거든요. 그러다가 작전이 일어나고 선원들은 다 도망가고 나도 안전지대로 도망가려고 했는데, 해적들이 나를 감시하니까 잡혔어요. 해적이 나보고 밖에 나가서 사격을 정지시키래요. 수백 발의 총알이 날아다니는 상황에서 못나간다고 하니까, 선원들을 잡아서 밀어내더라고요. 그래서 나가지 말라고 했어요. 이래서 죽으나 저래서 죽으나 죽는 건 똑같지만 밖에 나가서 죽으면 작전에 지장을 주니까 안에서 죽자 해서 앞에 누워버렸어요. 총알이 쏟아지니까, 자기들 안전이 중요한지 안전지대로 도망갔어요. 그래서 우리는 가만히 누워있는데 해적이 선장을 찾더라고요. 눈이 마주친 순간 쏴버렸어요.

 

[사진= 김호이 기자]


Q. 납치되면 해적 두목과 친해진다고 들었어요. 어떤 의미죠?
A. 납치가 되면 납치된 선박의 선장은 자기가 편하기 위해서 해적들한테 아부를 많이 해요. 제가 틀어져 있었거든요. 이유가 처음에 해적들이 나한테 자기들은 한국과 한국인을 좋아한대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자기들이 뭔데 한국과 한국사람을 좋아하나’ 했어요. 이유를 물으니까, 한국정부는 자기들이 원하면 원하는 대로 다 해준다는 거예요. 작전도 안하고, 돈도 많이 주고, 시키는 대로 다 한대요. 걔네들(해적들)한테는 좋은데, 제3자가 봤을 때 한국을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한국 자존심이 걸린 문제잖아요. 누군가가 반드시 이 고리를 끊어야겠더라고요. 선박 안에서는 해적보다 내가 잘 알잖아요. 그러니까 선박의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면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어요.

Q. 아덴만 여명작전을 통해 해적들이 한국 배와 선원들을 대하는 태도에 달라진 점이 있나요?
A. 해적들과의 소탕작전을 벌였던 아덴만 여명작전 이후에 한국 선박 납치가 거의 없었어요. 내가 탄 한국 선박이 9번째 납치된 것이었고, 그 전에도 종종 일어났는데 내 이후로 납치된 건 한번도 없었어요. 아덴만에서 한국 선박은 건들이지 말라고 한대요.

Q. 자신을 쏜 해적을 용서하셨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용서를 하셨나요?
A. 걔가 자진해서 나를 쏜 건 아니거든요. 자기 두목을 비롯해서 동료들이 한국 해군이 쏜 총알에 죽어가는 걸 눈으로 본 상황에서 얼마나 트라우마가 되겠어요. 나랑 똑같잖아요. 어떻게 보면 일반 국민이고 선원이고, 이런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용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2014년 1월에 용서를 했어요. 하지만 두목이었다면 달랐겠죠. 주도를 하는 사람과 선원은 고의성이 다르니까요.

 

[사진= 김호이 기자]


Q. 치료 과정이 정말 힘드셨을텐데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A. 나의 자아가 느껴졌을 때가 한 달 정도 지난 상황이었어요. 눈을 뜨니까,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동시에 왔거든요. 나는 필드 스타일인데 병원 안에만 있으려니, 여기서 살아나가도 온전한 몸이 아니라는 생각에 발버둥을 많이 쳤어요. 그러다가 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이것도 나한테 주어진 운명이고, 운명은 받아들여야 된다’ 싶어서 마음을 바꾸니까 나도 모르게 의사들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 따르게 되더라고요.

Q. 이국종 교수가 생명의 은인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석해균 선장이 본 이국종은 어떤 사람인가요?
A. 환자들한테는 지극정성이에요. 환자들 중에 이국종 교수를 싫어하는 환자는 별로 없어요. 근데 병원 관계자들은 무척 싫어하죠. 인생에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간점을 찾기가 참 어렵다는 걸 이국종 교수를 보면서 느꼈어요. 이 교수에게 이제 대충하고 당신 몸이나 챙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이제 성질 조금 죽이고 타협하면서 생활했으면 좋겠어요.

Q. 이국종 교수 외에 특히 더 기억에 남는 사람들이 있나요?
A. 2등 항해사 시절 당시 김준이라는 선장이 사업에 실패하고 다시 배를 타고 항해를 할 때였거든요. 그때 당시 선장이 나한테 "네가 선박생활을 관두고 밖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 거래가 발생하면 그 돈이 주머니에 들어갈 때까지는 절대 기분 나쁘게 하지 말고 최대한 협조를 하되 돈 들어오고 나서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살아가는 데 지혜가 된 것 같아요.

 

[사진= 김호이 기자]


Q. 항해를 하면서 뭘 얻었나요?
A. 항해를 하면서 희망을 얻었어요. 가보지 않은 곳의 항구는 어디 있을까 라는 기대감과 희망이 가득한 게 항해 같아요. 그리고 아덴만 여명작전을 통해서 이순신 장군의 어록인 '필사즉생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 죽자고 하면 살 것이고 살자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걸 실제로 느꼈어요. 세월호 선장은 필생즉사에 해당된다고 봐요. 선원들이나 승객들을 나몰라라 하고 자기 혼자 살자고 제일 먼저 안전지대로 도망갔죠. 그래서 감옥에 가서 무기수라 죽을 때까지 못나오잖아요. 죽은 인생이랑 똑같죠.

아덴만 여명작전에서 나는 죽자고 하고 내 몸을 던졌죠. 총알도 맞고 죽을만큼 구타도 당했어요. 근데 죽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그 말이 와 닿았죠. 평상심이 중요하다는 것도 느꼈어요. 숨어 있는데 총소리가 나니까 선원들이 떨더라고요.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떨지 말고 잘 버텨보자"고 했죠. 중요한 건 정신력인데 우리 속담에 '호랑이한테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잖아요. 저도 정신력 때문에 살아났어요. ‘포기하지 말라'는 말도 다시 한 번 곱씹게 됐어요. 포기와 실패는 달라요. 실패는 하나의 경험과 지식을 얻어요. 포기는 얻는 게 없잖아요. 나는 두 번 총살대에 설 때까지도 포기 안했어요. 그래서 성공했잖아요.

Q. 성함에도 바다 해(海)가 들어가고 진해에 사시는데 이 정도면 바다의 사나이 아닌가요?
A. 대부분 이름과 운명이 관계가 있겠냐 하는데, 나는 관계 있어요. 이름에 바다 해가 들어가서 해군에 갔고, 해군 제대하고 바다로 나갔잖아요. 선장 생활 잘하고 있는데 해적을 만났죠. 치료를 마치고 또 다시 해군으로 갔죠. 내가 죽으면 아마 바다로 뿌려질 것이라고 생각해요.

Q. 언제 선장의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세요?
A. 재선의무(화물이나 여객이 배를 모두 떠날 때까지 선박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가 선장의 의무예요. 비상시에 배에 있어야 되고, 선원들을 잘 콘트롤해야 하고 선박을 안전하게 운항해야 되거든요. 다른 건 다 잘했는데 사고가 발생했으니까, 안전하게 운항을 못한 거죠. 일단은 사고가 안 나야 되는 건데, 그래서 선장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자격이 부족했던 선장이었죠.

 

[사진= 김호이 기자]


Q. 선장님의 삶에서 방향타가 되어준 건 뭔가요?
A. 내 인생을 항해로 표현한다면 거친 파도 속에서의 항해예요. 내 인생이 그렇게 평탄하지는 않았어요. 목적지로 가기 위해 항해를 하다 보면 항상 평탄할 수 없어요. 언제 날씨가 변할지 모르잖아요. 그래도 한 번 목표를 정하면 끝을 봐야 돼요. 산에 올라가도 어떻게 해서든 정상에 올라가야 돼요. 나는 이게 방향타라고 봐요.

Q. 아덴만 여명작전 이후 석해균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A. 아덴만 여명작전을 겪고 병원에 있을 때가 한국나이로 60살이었어요. 병원에 있을 때 생일 케이크에 초를 한 개만 꽂았어요. ‘지금부터 한 살로 살아간다’라고 다짐하면서 여유를 갖게 됐어요. 그 전까지는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 하면서 가족들을 위해 더 벌려는 경쟁심이 많았거든요. 근데 운전하면서 누군가가 끼어들어도 ‘얼마나 급하면 그렇게 하겠나’라고 생각하면서 여유를 갖게 되고 많이 변했어요. 돈이 많아도 항상 궁핍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돈이 없어도 풍족하게 사는 사람이 있어요. 그건 마음에서 나와요. 그래도 생활이 규칙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어요. 밤 9시~10시에 자서 새벽 4시면 눈이 떠져요. 아무리 추워도 비가 안 오면 밖에서 매일 운동해요.

Q. 가보지 못한 곳 중에서 ‘여기는 꼭 가보고 싶다’하는 곳이 있나요?
A. 북한을 꼭 가보고 싶어요. 궁금하잖아요. 뉴스랑 실제는 다르거든요. 항구를 낀 국가들은 거의 다 가봤는데, 거기는 항구가 있지만 아직 못 가봤어요.

 

[사진= 김호이 기자/ 인터뷰 장면]


Q. 앞으로 뭘 하고 싶으세요?
A. 청소년과 관련된 일들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청소년교육학과도 졸업하고 청소년지도사 자격증, 인성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해놨어요. 최후의 순간을 생각할 때 그건 한 순간에 이뤄지는 게 절대 아니에요. 수없이 생각하다가 행동으로 옮기거든요. 누군가가 좋은 말 한마디만 해줘도 최후의 행동을 하지 않아요. 아까운 나이에 청소년들이 자살하는 걸 보면서 한마디 따뜻한 말 해줄 사람이 없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런 청소년들한테 관심을 가지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같이 생활하고 싶어요.

Q. 할아버지로서 청소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A.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고 행동을 하면 돼요. 청소년들 중에 뭔가 하라고 하면 포기를 먼저 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항상 긍정심을 가지고 ‘나는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노력은 자신과의 싸움이죠. 주위에서 노력하라고 하면 누가 노력합니까? 자기 자신이 자발적으로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중요해요. 담배도 주위에서 누가 끊는 걸 본다고 해서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자신이 결단을 해야 되는 거죠. 저는 30대에 담배를 끊었는데, 귀국해서 피우면 와이프가 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그 자리에 담배랑 라이터 놓고 안 피웠어요. 노력은 자기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해요.

Q. 마지막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 말씀해주세요.
A. 이 세상은 공짜가 없어요. 노력을 해야 돼요. 정당한 노력의 대가는 반드시 와요. 노력 안하고 돈 벌겠다는 건 있을 수 없어요. 꿈을 이루려면 희망을 갖고요.

 

[사진= 김호이 기자/ 석해균 선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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