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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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효 기자
입력 2018-02-0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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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일혁, 육군대학 총장 이종찬 장군과의 인연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 장군과 친분이 두터웠다. 두 사람의 깊은 인연은 진해에서 이뤄졌다. 차일혁은 1956년 2월에 충주경찰서장을 역임하고 나서 진해경찰서장으로 전출해 갔다. 모두가 부러워한 영전(榮轉)인사였다. 경찰관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던 자리였다.

그것은 바로 대통령의 별장이 있어 경무관 승진이 보장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는 차일혁의 전투경찰지휘관으로서 그동안의 뛰어난 전공(戰功)과 민주·치안·호국·문화경찰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이 인정받은 결과였다.

차일혁은 진해에서 제6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당시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던 이종찬(李鐘贊, 육군중장 예편, 국방부장관 역임) 장군을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은 곧은 성정과 정의감 그리고 무인(武人)으로서 기질이 서로 잘 맞아 떨어졌다. 거기다 문학적 소양까지 닮은 데가 많았다. 그 때문인지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곧 몇 십년지기처럼 금방 친하게 지냈다. 차일혁과 이종찬은 한시(漢詩)에 밝았고, 서예에도 일가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취미와 성향 덕분에 차일혁과는 금방 친숙해 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도 별로 없었다. 이종찬이 1916년생이고, 차일혁이 1920년생이니 4살 차이가 났다. 형님, 아우하기에 딱 좋은 나이였다. 거기다 두 사람은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그렇지만 차일혁이 이종찬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6·25전쟁 때문이었다. 이종찬은 낙동강전선 때 동해안의 포항지구 전투에서 3사단장으로 용맹을 떨쳤고,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 중에는 국군 사단 중 제일먼저 38도선을 돌파했던 사단장이었다. 북진 중 사단장직에서 물러나 후방에 있던 중 새로 취임한 이기붕(李起鵬) 국방부장관의 추천을 받아 정일권(丁一權, 육군대장 예편, 육군총장·합참의장 역임) 육군참모총장의 후임으로 제6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그때가 1951년 6월 상황이었다. 차일혁은 그때까지 제18전투경찰대대장으로 이름을 날릴 때였다. 그러니 두 사람은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무인으로서의 용맹이 풍문(風聞)으로 충분히 알려졌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차일혁과 이종찬 장군과의 인연은 1951년 12월 지리산(智異山)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빨치산토벌작전을 앞두고 시행된 토벌작전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미8군에서는 후방지역에서 준동하는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전방에서 2개 정규사단을 차출하여 ‘백야전전투사령부’를 창설하고, 지리산 일대의 후방지역에서 날뛰고 있는 빨치산들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게 됐다. 이때가 1951년 12월 1일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날 0시를 기하여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충청남북도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계엄사령관에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종찬 소장이 맡았고,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토벌사령관에는 백선엽(白善燁, 육군총장·합참의장 역임) 육군소장이 ‘백야전전투사령관’에 임명됐다. 예하에는 송요찬(宋堯讚, 육군중장 예편, 육군총장 역임) 준장이 지휘하는 수도사단과 최영희(崔榮喜, 육군중장 예편, 육군총장·합참의장·국방부장관 역임) 준장이 지휘하는 8사단 등이 전방에서 동원됐다.

여기에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와 전북을 비롯한 주변의 일선 경찰서 및 전투경찰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때 차일혁은 철주부대장(鐵舟部隊長)을 역임하고, 막 무주(茂朱)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겨 빨치산토벌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어찌됐든 차일혁과 이종찬 장군은 그렇게 해서 빨치산토벌을 총책임지는 육군참모총장과 일선 경찰서장으로 만나게 됐다.

그러다 차일혁이 1953년 2월 충주경찰서장을 마치고 경상남도 경찰국 산하의 진해경찰서장으로 부임해 가면서 당시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던 이종찬 장군과 만나게 됐다. 육군대학은 최초 경북 대구에서 창설됐다가 바로 진해로 옮겼다. 초대 육대총장은 제1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응준 장군이었다. 그 뒤를 이어 제2대 육군대학 총장으로 역시 육군총장을 역임한 이종찬 장군이 부임해 오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장이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고, 전임 육군총장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육군대학 책임자를 ‘총장’으로 부르게 됐다. 그것이 관례가 되어 이후 육군대학 책임자를 교장이라 하지 않고,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르게 됐다. 지금도 육·해·공군의 각군 사관학교의 최고 책임자는 총장이 아닌 교장이다.

차일혁이 이종찬 장군을 만난 것은 그가 1953년 육군대학 총장으로 부임한지 3년이 지날 때였다. 당시 이종찬 장군은 앞날에 대한 기약도 없이 진해의 육군대학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세월을 보내고 있던 시절이었다. 차일혁이 진해경찰서장으로 부임해 인사를 가자, 사람 좋기로 소문난 이종찬 장군이 자기 부하 한 명을 소개시켜 줬다. 그 부하는 다름 아닌 이종찬 장군 밑에서 육군대학 교수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재규(金載圭) 대령이었다. 차일혁은 처음 만난 그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시간이 있으면 술이나 한잔 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해서 차일혁의 진해시절은 시작됐고, 그 과정에서 이종찬 육군대학 총장을 중심으로 많은 장군들과 친분관계를 맺게 됐다. 그들은 모두 훗날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했던 거물들로 성장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들이 그렇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때였다. 그러기에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이해관계 없이 만난 순수한 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차일혁이 진해경찰서장으로 근무한 기간은 7개월이 조금 넘었다. 그 기간 동안 차일혁은 마음이 맞은 사나이들과 함께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차일혁은 주로 이종찬 육군대학 총장과 이종찬 장군이 총애하던 김재규 교수부장과 틈만 나면 어울리며 술을 마셨다. 이른바 사나이들의 의기투합이었다. 술자리에서는 주로 답답한 시국(時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국을 타개할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술자리를 하고 나면 기분전환이 됐다. 그런 점 때문에 자주 술자리를 갖곤 했다. 김재규 교수부장은 이종찬 총장이 총애하는 부하인지라 같이 만나 술자리를 가졌지만 그는 술에 약해 금방 취하곤 했다. 그럴 때면 김재규 는 서장 관사에 와서 신세를 지곤 했다. 모두 술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었다.

진해는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는 휴양도시이자 군사도시였다. 전시에는 육해공군 사관학교를 비롯하여 진해통제부 등 해군의 주요 부대가 산재해 있었다. 여기에 육군의 최고학교기관인 육군대학이 이전해 옴으로써 진해는 명실상부한 군사도시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됐다. 그 중심에는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육군대학 총장으로 있는 이종찬 장군이 있었다.

이종찬 장군은 제2대와 제4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채병덕(蔡秉德, 육군중장 추서) 장군과 일본 육군사관학교 49기 동기생이었다. 동기생 두 사람이 6·25전쟁을 전후하여 육군총수를 맡아 지휘했으니 자연히 군의 중심인물로 떠오르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거기다 채병덕 장군은 전쟁 초기에 일찍 전사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인물은 이종찬 장군 뿐이었다. 그러다보니 많은 후배 장성들이 그의 강직한 성품과 인격을 신망(信望)하며 따랐다.

차일혁도 그런 이종찬 장군과 같이 지내면서 육군의 장성들뿐만 아니라 해군제독들과도 친분을 쌓게 됐다. 당시 해군사관학교장은 박정희(朴正熙) 장군이 가장 존경하던 이용문 장군의 실형(實兄)인 이용운(李龍雲) 제독이었다. 이용운은 이승만 정부 말기에 해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차일혁은 진해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서장의 신분 덕택에 많은 군 인사들과 교분을 나누게 됐다.

박정희 장군과도 진해에서 친분을 쌓게 됐다. 전방의 5사단장을 역임하고 육군대학 학생신분으로 오게 된 박정희와 이종찬 장군은 잘 아는 사이였다. 과거 이종찬 육군총장일 때 박정희는 작전교육국 차장이었다. 박정희는 군대생활을 하면서 딱 두 사람을 존경했다고 한다. 그 두 사람이 바로 차일혁과 친했던 이용문(李龍文, 육군소장 추서) 장군과 이종찬 장군이었다. 기연(奇緣)이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 장군이 진해에 온 뒤로 차일혁의 술친구가 한명 더 늘어난 셈이다.

이종찬 장군의 꾸밈없는 부탁과 차일혁의 대가없는 도움으로 진해에서 전세 방을 구하게 된 박정희 장군이 “차일혁을 어찌 생각했는가?”는 나중에 박정희가 차일혁의 아들 차길진(車吉辰)에게 보여 준 행동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 뒤로 차일혁과 이종찬 그리고 박정희 장군은 자주 술자리를 가지며 어울렸다. 의기투합이 아닐 수 없었다. 나중에 그들이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를 때였다. 그들은 사람 냄새나는 그런 것들이 그저 좋아서 자주 만났고, 그래서 술을 마셨고, 그리고 취하면 장단에 맞춰 노래 가락을 읊조리다가 헤어지곤 했다. 노래 가락의 단골메뉴는 늘 ‘황성옛터’와 ‘봄날은 간다.’였다. 사나이들의 호기(豪氣)가 가득 서린 만남과 헤어짐이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길지는 않았지만 몇 십 년을 두고 사귄 친구 못지않게 우정이 싹텄다.

그렇기 때문에 차일혁이 중상모략을 받고 충남도경의 경비과장으로 좌천되면서 떠날 때, 이종찬 육대총장은 자신의 집무실로 찾아온 차일혁에게 눈물까지 보이며 아쉬워했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박정희 장군은 헐레벌떡 뛰어와 아쉬운 이별을 달랬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바로 그들과의 영원한 이별로 결말 지워졌다. 차일혁이 불의의 사고로 1958년 순직했기 때문이다. 때를 만나지 못한 그들 사나이들의 우정은 그렇게 끝났다. 그들은 모두 차일혁을 선두로 앞서거니 뒤서가니 하며 저 세상으로 갔다. 하지만 그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진해에서의 ‘뜨거운 우정’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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