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80] 뭉케의 죽음은 어떤 사태를 불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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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11-10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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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남송 원정 쿠빌라이 제외

[사진 = 뭉케의 남송원정도]

1257년, 뭉케는 남송과의 전쟁에 나선다. 지지부진한 남송과의 전쟁을 조속히 마무리 짓기 위해 대칸인 자신이 직접 앞장 선 것이다. 뭉케는 남송 원정에 나서면서 쿠빌라이를 배제시켰다. 이에 관한 설명이나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독자세력을 키워나가는 쿠빌라이에 대한 뭉케의 견제이자 불만에서 나온 처사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쿠빌라이의 자리는 동방 옷치긴(칭기스칸의 동생)家의 젊은 후계자 다가차르가 대신했다.

▶ 남송원정, 뭉케가 주도

[사진 = 중국 불모지]

남송 원정군은 서하를 거쳐 사천지방에서 동쪽으로 치고 나가는 뭉케의 중앙군과 좌측의 다가차르군, 그리고 대리 원정 후 남쪽 지방에 남아 있다가 북동쪽으로 접근해 간 우랑카타이군 등으로 구성됐다. 역시 몽골 전통의 3군단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 본토의 중앙부분은 금나라와 남송 사이의 120년에 걸친 충돌 결과 거의 황폐화돼 폭이 3-4백 Km에 이르는 불모지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통한 군대의 행군과 보급이 어려웠다. 그 곳을 지나면 또 다시 장강이 가로막고 있어 이중의 장애물이 가로 놓여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좌측의 다가차르 군대는 불모지를 피해 중국의 중앙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한수를 따라 남하한 뒤 장강 중류지역을 제압하고 우랑카타이군은 운남(雲南)에서 베트남을 거쳐 남쪽에서 협공해 들어간다는 전략이었다. 그 작전이 효과를 거두면 뭉케가 이끄는 몽골 본대가 남송으로 서서히 진군해 들어간다는 도식이었다.

▶ 쿠빌라이의 재기용

[사진 = 양양과 번성]

작전의 성패는 다가차르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서 차질이 빚어졌다. 다가차르가 이끄는 좌익군단은 1257년 가을, 한수를 사이에 둔 양양(養陽)과 번성(樊城)이라는 쌍둥이 도시에 대해 일주일 정도 공격을 하는 시늉을 하더니 장맛비를 이유로 갑자기 철수해 버렸다. 양양과 번성은 나중에 쿠빌라이에 의해 점령되면서 남송 붕괴의 시발점이 되는 중요한 작전 지역이었다.
 

[사진 = 황하]

 

[사진 = 황하]

다가차르의 철수라는 갑작스런 사태로 작전 계획은 엉망이 돼버렸다. 과격한 뭉케가 다가차르를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었다. 뭉케는 다가차르를 끌어내리고 애초 그 자리를 맡았어야 당연했을 쿠빌라이를 다시 기용했다. 쿠빌라이군은 일만의 몽골군에 거란과 여진 그리고 한인이 합쳐진 혼성군이었다. 새로 편성된 쿠빌라이의 동로군은 가을이 오자 황하를 건넜다. 그리고 회하를 건너 장강에 도달하려고 했다.

▶ 갑작스럽게 숨진 대칸 뭉케
여기에서 고비 때마다 대몽골 제국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는 최고 지도자의 죽음이라는 돌연 변수가 다시 등장한다. 사천지방에서 발생한 뭉케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 것이다. 서하 정벌에 이어 남송으로 향하던 칭기스칸의 죽음이 남송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자져오기는 했다. 하지만 칭기스칸은 죽을 만큼 연로했고 후계자도 지명해 뒀다는 점에서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이후 오고타이의 죽음은 유럽 정벌을 멈추게 만들었고 구육의 죽음은 친족 사이의 혈전을 막아줬다. 이제 뭉케의 죽음은 향후 제국의 향방을 혼미하게 만들 상황이었다.

▶ 대권 향방이 최대 관심사

[사진 = 고비 사막]

뭉케는 1258년 10월 육반산 지구에서 사천의 동부지역으로 들어섰다. 지지부진한 전선을 타계하기 위해서는 성질 급한 자신이 먼저 나설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중국의 수많은 산과 강을 지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인구가 많은 도시는 익숙하지 못한 공성전을 통해 그들을 제압한 뒤 다시 전진해야 하는 진군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여름, 뭉케의 주변 인물들은 사천지방의 폭염을 피하기 위해 북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그렇지만 이 같은 권유를 물리치고 뭉케는 강경 일변도의 자세를 계속 유지했다. 이 때 역병이 사천의 뭉케군을 엄습했고 뭉케는 그 역병으로 갑자기 숨졌다. 이질이라는 설도 있고 콜레라라는 주장도 있고 정확한 병명은 알 수 없다. 그 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대칸이 갑자기 죽었다. 무리한 시도가 죽음을 부른 것이다. 다시 누가 대권을 잡을 것인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 후계자 경쟁 신호탄

[사진 = 아릭부케 초상화(집사)]

뭉케의 죽음!
그 것으로 몽골제국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았다. 남송과의 전쟁은 이제 뒷전으로 밀려난 채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하는 것이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뭉케의 죽음은 곧바로 후계자 경쟁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러한 사태가 찾아올 것을 기다린 듯이 준비해온 쿠빌라이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뭉케의 세 동생, 즉 쿠빌라이와 훌레구 그리고 아릭 부케였다. 뭉케에게 네 아들이 있었지만 어린 탓에 경쟁자로 나설 형편이 아니었다.
 

[사진 = 쿠빌라이 초상화(집사)]

삼 형제 가운데 훌레구는 멀리 이슬람지역에 있었다. 훌레구는 이집트의 맘룩조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는 도중 뭉케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몽골고원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군대를 돌려 아제르바이잔 지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망 소식이 전해지는 데 많은 시일이 걸린 데다 도중에 형과 동생사이의 대권싸움 소식을 듣고 이란 땅에 머물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 곳에다 자신의 독자적인 영토를 건설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훌레구는 경쟁자 대열에서 제외됐다.

▶ 아릭 부케가 가장 강력한 후보
결국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가장 강력한 후보자였다. 두 사람 중에서는 막내 아릭 부케가 단연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는 수도 카라코룸에 있으면서 몽골 서쪽 아르항가이에서 알타이 지역에 이르는 툴루이가의 영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정통성 면이나 세력 면에서 쿠빌라이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진 = 카라코룸의 까마귀]

당연히 카라코룸에 있는 뭉케 정부의 사람들은 아릭 부케를 지지하고 있었다. 뭉케의 급사는 뭉케 진영에 있던 모게의 밀사에 의해 즉각 쿠빌라이에게 전달됐다. 모게는 쿠빌라이의 젖먹이 이복형제였다.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앞으로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여기서 쿠빌라이는 대권을 움켜쥐기 위해 도박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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