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교 130년사⑦] 무덤을 둘러싼 힘겨운 고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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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입력 2017-10-26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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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차이나-인천대 중국학술원 공동기획

  • 화교 공동묘지, 인천 외국인 묘지 구석에 ‘더부살이’

인천 다소면 화동 소재 청국의지측도(仁川府多所面禾洞淸國義地測圖).[사진=인천화교협회]

인천은 개항 이후 중국인, 일본인, 서양인 등을 포함한 이질적 가치관과 생활양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문화다양성이 허용되는 국제도시였다. 인천에 외국인 묘지, 일본인 묘지, 중국인 묘지가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다는 게 그 하나의 예증이라 할 것이다.

인천 청학동의 별도 공간에 고즈넉이 자리한 외국인 묘지는 주로 조선의 근대화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한 서양인들이 잠들어 있는 명소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외교관, 통역관, 의사, 선교사, 무역상 등이 대부분이다.

반면 중국인 묘지나 일본인 묘지는 한국인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는 인천부평가족공원 한쪽에 더부살이하듯 미미한 존재로 남아 있는 게 작금의 상황이다.

억측이지만, 아마도 여기에는 우리의 서양 중심적 사고와 외국인의 존재를 우리의 시각과 가치에서만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가 암묵적으로 잠재돼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중국인 묘지에 매장돼 있는 사람들의 다수는 자신들의 존재가 한국 사회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지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생업에 힘쓰고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는데 급급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스승이나 친구로 때로는 경쟁자로, 조선의 근대화와 한국 사회의 발전에 촉매자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갖는 존재였는가를 따지기 전에 그들 자체의 타향살이가 과연 어떠했는지, 그 신산한 삶의 궤적을 곰곰이 되짚어보는 것이 종족적 다양성과 문화적 혼종을 모토로 다문화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우리의 몫이자 소임이란 생각이다.

인천에 거주하는 어느 화교 어르신의 말이 떠오른다. “우리가 이 땅으로 건너오면서 가지고 들어온 것들, 또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경험했던 갖가지 사건들, 이게 다 우리 화교공동묘지 안에 들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른 건 잘 몰라도 우리 공동묘지는 화교역사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화교공동묘지’란 말 그대로 한국에 거주했던 화교들이 영면하고 있는 공동묘지로 통상 ‘중화의지(中華義地)’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보다 익숙한 용어라면 ‘중국인 공동묘지’가 될 것이다. 이 화교의 말처럼 130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한국 화교사회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국 화교들의 다양한 삶의 면면에 대한 무언의 기록이 바로 인천에 소재한 중국인 묘지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 중국인 묘지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학계의 열의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인 묘지는 그동안 이질적인 사회와 공존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던 우리에게는 꽤나 생경한 존재이고 관심 밖의 대상이었던 게 사실이다.

현재 인천에 거주하는 화교노인들의 희미한 기억과 인천화교협회를 중심으로 한 교령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초창기 한반도에 거주한 중국인들이 처음부터 정식 묘지를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화교(華僑)’의 ‘교(僑)’란 임시거주의 의미를 갖고 있다. 실제로도 초기 한반도 거주 화교들의 경우, 대부분 삶의 터전은 고향인 중국에 그대로 둔 채 홀로 조선에 건너와 돈벌이를 하는 이른바 ‘단신출가(單身出稼)’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따라서 불의의 사고 등으로 인해 조선 땅에서 객서(客逝)했을 시에도 배를 통해 시신을 고향땅으로 가져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화교들의 언급에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과거 산동동향회관(山東同鄕會館, 현재 인천파라다이스호텔 근처) 한쪽에 배에 실어 고향으로 운구해 갈 ‘유체(遺體)’를 보관하는 임시안치소 같은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 시체안치소의 위생환경이 너무도 열악해 인천 내리(內里) 일대에 임시매장지를 꾸렸다는 것이다.

언제든 기회가 닿으면 고향으로 옮겨갈 시신이었기에 특별히 묘비를 세우지는 않고 간단한 표식 정도만을 해둔 일종의 ‘가묘’였다는 게 그들의 기억이다.

중국인, 그중에서도 한족(漢族)의 풍습은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는 이른바 토장(土葬)이 일반적인 매장방식이었다. 전통적으로 상례(喪禮)를 중요시했던 이들에게는 ‘사람은 땅에서 낳았으므로 땅으로 돌아가야 평안함을 얻는다’는 입토위안(入土爲安)의 관념이 오랫동안 그들의 의식 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초기 한반도 화교들이 묘를 쓰지 않고 시체안치소에 시신을 쌓아두는 것은 위생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들의 상례관(喪禮觀)에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해가기 전까지 만이라도 가매장할 수 있는 임시묘지를 그토록 원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천화교들이 기존의 내리 묘역을 반납하는 대신, 지금의 도화동(당시 다소면 화동) 지역으로 중화의지를 옮겼을 당시에도 매장의 목적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천 중국인 공동묘지는 화교 사회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총 세 번의 이전과 이장을 경험해야 했다.

그때마다 정부당국이 내세운 이유는 하나같이 ‘개발’이었다. 내리에서 도화동으로 이전할 때에는 일본의 식민지건설에 따른 시가지 정비가 그 구실이었다. 또 도화동에서 만수동으로 이전할 때에는 인천도시계획에 따른 개발, 만수동에서 부평가족공원으로 이전할 때에는 만수동 택지지구 조성 및 구월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의 일환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조상의 무덤을 이장하는 문제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은 주지하는 바일 것이다. 더욱이 상례를 중시하는 중국인이나 한국인에게는 더더욱 신중히 처리해야 할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화교 사회와 한국의 행정당국 사이에 크고 작은 분규가 없을 리 없었다.

특히 도화동에서 만수동으로 묘지를 이전할 때에는 이장 후에 공지(空地)로 남게 되는 도화동 공동묘지 터를 둘러싸고 법정소송이 발생하기도 했다. 인천시는 50년간 무상임대조건으로 만수동의 토지 2만여평을 중국인 공동묘지 용도로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인천 화교사회는 만수동으로 묘지를 이전하기로 하고, 차제에 기존의 도화동 터를 매각해 화교학교를 신축할 생각이었다. 과거에도 화교사회는 묘지와 관련된 지세나 매각비용 혹은 각종 보상비를 공적기금으로 환원해 화교학교의 운영 및 건축에 사용해왔다.

어쩌면 이는 세상을 떠나는 선대가 후대에게 남겨주는 일종의 마지막 유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인천부평가족공원 내 외국인특화묘역.[사진=인천화교협회 제공]


공교롭게도 만수동으로의 묘지 이전을 확정한 시점에 남은 도화동 공지에 대한 소유권을 두고 인천의 성광학원(선인학원의 전신)과 문제가 발생하게 됐고, 급기야는 소송으로까지 이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일명 ‘부르도자 사건’이라 부른다. 성광학원이 도화동 화교묘지의 토사를 무단으로 채굴해 간 것에 그치지 않고 나중에는 아예 ‘불도저’로 무덤을 밀어버리고 그곳에 교사를 신축했다는 데에서 비롯된 별칭이다.

인천부평가족공원 내 외국인특화묘역.[사진=인천화교협회 제공]


인천 화교사회는 재산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당국에 진정서를 냈고 인천시는 이를 받아들여 성광학원의 신축교사를 불법건축물로 규정하고 자진철거토록 명령했다. 하지만 성광학원은 인천시의 시정조치에 불응하고 해결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결국에는 화교사회의 소유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의 소송을 냈다.

 

인천부평가족공원 내 외국인특화묘역[사진=인천화교협회 제공]

이곳의 땅이 화교사회의 공공재산임은 인천시 당국도 인정하고 있었으나, 사실 이는 그동안의 관행에 따른 것이지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이번 소송은 성광학원 측의 승소로 끝이 났고, 결과적으로 화교사회는 자신들의 공공재산을 눈앞에서 빼앗겨 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물론 법리적 근거에 이의를 제기할 일은 아니겠지만, 당시 화교들이 느꼈던 감정은 마이너리티로서의 서글픔이 아니었을까?

이후에도 중국인 공동묘지를 둘러싸고 화교들의 수난은 계속됐다. 심지어 그동안 독자적인 묘역을 조성해왔던 중국인 공동묘지가 지금의 부평 인천가족공원으로 옮겨가면서부터는 한국인묘역, 일본인묘역과 함께 공원 한쪽에 ‘중국인 묘역’이란 조그만 간판만 내건 채 곁방살이를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마저도 다시금 개장(改葬)이 됐다.

인천시는 인천가족공원의 재정비를 통해 장사시설을 확충하고 환경생태를 복원해 궁극적으로 시민공원화 하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이에 화교들에게도 중국인묘역에 자리한 봉분을 모두 없애고 화장을 통한 납골을 요구했던 것이다.

관내에 더 이상 분묘설치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은 마당에 화장을 독려하고자 하는 인천시의 입장과 고충을 화교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됐든 조상들의 무덤을 다시 건드려야 하는 난감한 지경에 당혹스러운 것 또한 사실이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인천 화교사회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인천시와 힘겨운 줄다리기를 벌여왔다. 지금은 일정 정도 타결을 보고 중국식 봉안당과 사당(廟)을 설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음에도 화교사회로서는 여전히 마뜩지 않아 보인다.

아마도 이는 자신들의 뜻과는 무관하게 몇 번의 강제이장을 겪어야 했고, 그 와중에 법정소송을 통해 자신들의 소유라고 여겼던 땅까지 억울하게 빼앗긴 결코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 부정적으로 작용했을 게 틀림없다.

인천시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에 대한 화교들의 불신과 피해의식이 그 배경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신뢰는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가능하다. 한국사회가 화교 및 화교사회를 일방적인 수혜자로 보거나, 시혜를 베풀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인식한다면 상호 간의 신뢰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누대에 걸쳐 인천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를 언젠가는 중국으로 돌아간다는 ‘낙엽귀근(落葉歸根)’의 존재로 생각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은 이 땅에서 살다가 이 땅에 묻힐 ‘낙지생근(落地生根)’의 사람들이다.

그들이 더 이상 피해의식을 갖지 않도록 하는 현명한 해법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이것이 다문화사회를 지향하고 문화혼종을 용인하고자 하는 우리 모두가 기껍게 짊어져야 할 소임이라고 본다.

[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 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중국현대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대 중국학술원 부원장 겸 교수를 맡고 있다. 중국학술원에서 화교생활사 및 화교관행을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한국 화교’ 연구의 현황과 미래 등이 있고 저서로는 ‘동남아화교와 동북아화교의 마주보기’(공저), ‘그래도 살아야 했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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