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51] 케식텐은 어떤 친위조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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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석규 칼럼니스트
입력 2017-09-20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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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칸의 신변 보호 친위조직

[사진 = 칭기스칸 좌상]

칭기스칸은 독재자적인 자질과 민주적인 사고가 뒤섞여 있는 복합형의 인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시스템의 운영에 있어 조직의 민주화를 이루는 많은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통치 권위에 대한 도전에 대해서는 어느 독재자보다 잔인하게 대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이너서클(inner circle)에 대한 권한부여와 무한한 신뢰를 통해 통치기반을 다졌다.

칭기스칸의 시대가 전시통치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한 시스템 운영은 전적으로 칭기스칸 만이 가진 통치능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케식텐이라는 시스템을 운영하는 과정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케식이란 우리말로 하면 친위(親衛)가 될 것이다. 케식텐이란 케식의 복수형이다. 그러니까 친위대, 친위세력으로 이해하면 된다. 케식텐이란 칸의 신변을 안전하게 호위하는 조직이다.

▶ 충성을 앞세운 친위대 케식텐

[사진 = 몽골군 사열]

이 케식텐은 천호제와 함께 푸른 군대의 핵심을 차지한 조직이다. 케식텐은 마치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은 형태로 좌우와 중앙으로 포진시킨 몽골제국의 3분할체제 가운데 가장 중앙 핵심부를 맡고 있는 친위부대였다. 몽골의 특수 엘리트들로 구성된 이 조직은 대칸에 대한 충성을 최상의 덕목으로 내세운 귀족제적인 집단이었다.

▶ 친위대 만 명까지 확대

[사진 = 몽골 소녀 궁사]

케식텐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몽골 통일전쟁과정에서였다. 자모카와의 마지막 전쟁을 준비할 때부터 칭기스칸은 충성스러운 너흐르들로 구성된 친위부대 케식텐을 창설했다. 출발 당시에는 주간 친위대가 70명, 야간 친위대가 80명으로 소규모였다. 하지만 대몽골 제국의 출범과 함께 칭기스칸은 그 수를 대폭 늘려 거대한 조직으로 확대 발전시켰다.

"영생의 텡그리 힘으로 천지에 기력이 더해지면서 모든 나라를 바로잡아 나의 고삐에 들게 한 이제 내게 친위대원을 천호별로 뽑아 들여라. 숙위, 궁사, 근위들을 뽑아서 만 명을 채우도록 하라. 또 친위대를 뽑아 들이는 영을 천호마다 공포해 만호, 천호, 백호의 아들들이 친위대에 들어올 때 재능 있는 자, 용모가 단정한 자, 우리 곁에서 행할만한 자를 들도록 하라." 몽골비사에 나타난 칭기스칸의 명령이다.

▶ 주야간 친위대와 궁사로 구분
천호장의 아들이 케식텐에 선발되면 열 명의 추종자와 아우 한 명을 같이 오게 했다. 또 백호장의 아들은 추종자 다섯 명과 한 아우를, 십호장의 아들과 평민의 아들이 들어올 때는 세 명과 아우 한 명을 각각 동반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칭기스칸의 지시대로 만 명을 채웠다. 나중에는 정복지의 아들들도 여기에 포함됐다. 그래서 야간 친위대는 800에서 1,000명, 궁사는 400에서 1,000명 그리고 주간 친위대는 8,000명이 됐다.

[사진 = 귀족 오르도 내부]

주간친위와 궁사는 낮에 칭기즈칸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해가 지기직전 야간친위와 교대했다. 야간친위 근무는 엄격했다. 밤에는 야간친위를 제외하는 누구도 칭기스칸이 머물고 있는 오르도(막사) 주위를 돌아다닐 수 없었다. 만약 야간친위의 허락 없이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목을 베도록 했다. 급한 보고가 있으면 궁궐의 북쪽에서 야간친위에게 말하도록 했다. 또 근무 중인 야간친위의 숫자는 비밀에 부쳤고 밤에는 야간친위가 전권을 행사하도록 해 왕실의 안전을 꾀했다.

▶ 인질제도를 통한 안전장치 마련

[사진 = 몽골 씨름 선수의 춤]

칭기스칸이 이 조직을 만든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수많은 부족들의 집단적인 이기주의를 누르고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창출해 내기 위해서였다. 그 의도는 그대로 적중했다. 대몽골 제국은 이해가 엇갈리는 여러 종족이 뒤섞여진 형태로 출범한 다민족 국가지만 출범이후 감히 대칸에 대한 도전을 꿈도 꾸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도 전적으로 케식텐의 존재 때문이었다.

케식텐의 조직과 운영 형태를 보면 철저한 인질제도나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도전이나 모반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골국립대역사학과 뭉크 에르덴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천호장과 백호장 그리고 십호장의 아들들은 반드시 케식텐에 들어가야 했다. 만일 들어가지 않으면 사형에 처했다. 아들이 케식텐에 속해 있기 때문에 천호장들은 칭기스칸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조직은 모반이나 음모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장치로서도 큰 역할을 했다."

고려 무신정권에서 활용했던 삼별초(三別抄)도 이와 비슷한 성격으로 볼 수 있다.

▶ 일개 병사가 천호장 보다 높아

[사진 = 지역 축제 행사]

그렇다고 해서 이 조직에 선택된 사람들이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칭기스칸 일족에게 충성을 맹세한 대가로 주어진 각종 특권을 뽐내며 자랑스러워했다. 케식텐의 병사는 다른 부대의 천호장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밖에 있는 천호보다 나를 친위 하는 자가 높다. 밖에 있는 천호가 감히 나를 친위하는 자와 대등하다고 여겨 다투면 천호를 벌하도록 하라."

칭기스칸이 이들을 이처럼 감싸고 나섰으니 그들의 지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월권을 행사하거나 과도한 권력남용으로 문제를 야기할 때는 칭기스칸이 가족이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자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다양한 직책 총 망라

[사진 = 몽골의 악사]

이들은 직책도 다양했다. 활을 쏘는 궁사에서부터 시작해 칼 찬 사람, 매를 관리하는 사람, 요리사, 종마관리자, 통역사,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 술 배급자, 성문을 지키는 병사, 낙타 관리자, 의복을 세탁하고 관리하는 자 등 특수직업인들이 총망라될 정도였다. 평소에 자기의 직분을 수행하던 이들은 전시에는 모두 지휘관으로 역할이 변경됐다.

또 기본적인 자기 임무 외에 이들은 칸에게 정책조언을 하고 칸이 결정한 일을 집행했다. 이 조직은 지방 군벌들의 전횡과 속민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소요를 막는 역할도 했다. 케식텐군에 속하는 친위대원들은 또한 국가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쿠릴타이의 정식멤버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칸을 선출할 때 그들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 국가 경영의 중심 축

[사진 = 몽골군 전투도]

그런 점에서 볼 때 케식텐은 군대 조직이라기보다는 국가를 경영하는 중심 축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후 친위대는 수많은 장군과 대제국의 행정을 관장하는 관리들을 배출해 몽골 정부의 중추가 됐으며 그 역할은 칭기스칸의 아들과 손자에게서도 계속되었다.

꼭 정확한 비교는 아닐지 모르지만 오늘날로 치자면 경호실을 포함한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에다 보안사령부와 수도경비 사령부를 합친 막강한 힘을 지닌 조직이었다. 이 조직을 통해 칭기스칸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일사분란하게 나라를 통치할 수 있었고 그 것이 세계전쟁을 강력히 밀고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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