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2세들이 기억하는 'LA폭동'…"25년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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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4-28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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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상인은 총 든 자경단원, 탐욕스런 자영업자로 그려져"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옥철 특파원 = 촉망받는 영화감독 저스틴 전(35) 씨는1992년 4·29 '로스앤젤레스(LA) 폭동'이 일어날 당시 열 살 소년이었다.

한국 해병 출신인 아버지는 LA 파라마운트에서 신발 가게를 운영했다. TV에 시내 상점들이 불타는 장면이 나오던 그날 아버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아버지 가게에 들른 그는 약탈로 처참한 폐허로 변한 상점 내부와 부서진 진열대, 찢겨진 신발 상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권총이 들어 있었다.

한미관계 연구자인 캐롤 박(37) 씨는 폭동 당시 열 두 살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과 사별하고 컴턴에 주유소를 차려 홀로 삼남매를 키워냈다. 폭동이 도심을 뒤흔들던 날 저녁 캐롤은 어머니를 애타게 찾았다.

어머니가 돌아온 건 한밤중이었다. 애들이 숙제를 했는지 챙겨본 뒤 말없이 부엌에 남은 찬밥을 들었다고 한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AT)는 27일(현지시간) 재미 한인 이주사의 최대 비극으로 기록된 LA 폭동 발발 25주년을 맞아 저스틴 전·캐롤 박 씨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이제 성인이 된 재미 한인 2세들의 시각을 전했다.

저스틴 전 씨는 영화 '트와일라잇'에 나온 배우이자 선댄스 영화제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한 신예 감독이다. 그는 영화의 소재로 한국 사람들이 '사이구(4·29)'라고 부르는 LA 폭동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폭동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경험한 아버지에게 그날의 기억에 대해 말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오래 전 잊혀진 기억을 들춰내는 것에 몹시 당황했다.

캐롤 박 씨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계산대에서 일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웠던 생활전선에서 그녀는 '판매원의 언어'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미국사회에서 상점을 지키는 한인의 이미지는 '총에 의존하는 자경단원' 또는 '탐욕스러운 자영업자'로만 그려졌다.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대(UC리버사이드)에서 수학한 그녀는 '계산원의 비망록: 한인, 인종주의, 폭동'(Memoir of a Cashier: Korean Americans, Racism and Riots)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녀는 당시 방탄 유리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계산대 안에서 흑인들이 '펌프(주유기)를 일부러 늦게 돌려 돈을 더 받아내려는 탐욕스러운 한국놈들,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가지 마라'고 외치는 욕설을 들었다고 한다.

박 씨는 "욕을 듣는 것에 진저리가 났었다.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상황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도 진력이 났다"면서 "때로는 괴혈병에 걸린 선원들처럼 서로 저주를 하며 살아갔다"고 썼다.

박 씨와 그녀의 어머니는 '지난 25년 동안 그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폭도들이 주요소 철문을 부수고 도구를 가져가 남은 기름까지 약탈해간 날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건너편 도넛 가게는 방화로 전소됐다. 그녀는 무엇이 흑인들을 분노하게 했는지 의아하다고 기억했다.

"왜 빌어먹을 동양인(gook)으로 취급받는지, 우리 한인들의 얼굴이 기름값이나 담뱃값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저스틴 전 씨의 아버지는 최근 아들의 선댄스영화제 출품을 축하해줬다. 그러면서 그는 입을 열었다.

"폭동이 일어나던 날, 도심이 불타던 날, 그날도 고속도로를 가까스로 빠져나오니 평화롭게 골프를 즐기던 무리를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겐 딴 나라 얘기였다. 그들의 집은 당하지 않았으니까"라고 기억했다.

4·29 LA 폭동은 1992년 4월 29일 교통 단속에 걸린 흑인 청년 로드니 킹을 집단 구타한 백인 경관 4명에게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이 내려지자, 분노한 흑인들이 LA 도심으로 일제히 쏟아져 나와 폭력과 약탈, 방화를 일삼은 사건이다.

흑인들의 분노는 한인에게로 집중적으로 분출돼 당시 LA 도심에 있던 한인 상점 2천300여 곳이 약탈 또는 방화 피해를 봤다.

5월 3일까지 이어진 폭동으로 사망자 53명, 부상자 4천여 명의 인명 피해와 물적 피해 10억 달러를 기록했다.

oakchul@yna.co.kr

(끝)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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