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백사실 계곡의 명당터에는 허(許)도사가 최초로 자리를 잡았다

원철 스님
[원철 스님]

 
 
종로구 석파정을 다녀온 뒤 며칠 지난 후 맞은 편에 있는 백사실 계곡을 찾았다. 석파정과 백사실은 자하문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서로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다. 부암동 골목길을 끼고 있는 응선사(應禪寺) 사찰 입구에서 몇 걸음을 옮겼더니 검은 아스팔트 위에 ‘백사실’이라는 흰 페인트 글씨가 방향을 가르키는 화살표와 함께 나타난다.
 
지역민들은 예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백사실 계곡’이란 명칭을 가장 선호했다. 그 이유는 백사(白沙1556~1618 이항복)선생과 연결된 것이다. 늘 열등감과 패배감으로 짙눌린 선조임금을 임진란 전후 시기에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정치적 인간적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이 계곡의 별장으로 달려와 며칠 쉬면서 복잡한 심경을 달래면서 머릿 속을 정리했을 것이라는 상상도 충분히 가능하겠다.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백사선생이 자주 왔던 계곡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자연스럽게 백사실 계곡이라고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문헌기록에는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구전은 구전대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니 ‘그런가 보다’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면 될 일이다. 왜냐하면 스토리텔링은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할수록 좋은 문화 콘텐츠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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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사계곡 별서터 안내판, 사진 필자 제공] 


 
초여름에 나무그늘이 싱그러운 오솔길을 따라가니 이내 큰 바위에 새겨진 선명한 글씨 ‘백석동천(白石洞天)’이 미간을 확 끌어 당긴다. 누가 봐도 “와!”하는 감탄사가 나올 만큼 큰 글씨로 단정하게 새겨놓은 명필이기 때문이다. 백석동천은 골짜기가 흰 화강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까닭에 백석실 계곡으로도 불리었다. 일설에는 백석실 계곡이 발음하기 편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백사실 계곡으로 바꿨다고도 한다. 하지만 윤치호 일기에는 ‘1926년 11월에 백석실을 유람했다’고 되어있다. 먹물 묻힌 농도에 따라 지식층과 서민층은 백석실과 백사실을 자기 편한대로 선택해 불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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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위에 새겨진 백석동천 글씨, 사진 필자제공] 


 
이내 ‘백사실 별서(別墅 별장)터’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사랑채와 안채의 주춧돌과 담장의 석축일부 그리고 진입계단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몇 백평의 옛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둘레 100m쯤 되는 연못터와 함께 육각정 기초석이 서있는 자리에서 발길이 한동안 멈추었다. 1930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실려있던 백석곡 육각정 실물사진을 안내판에서 만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격조 높은 조선 사대부 정원의 편린을 엿보게 한다.

육각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월암(月巖) 이광려(李匡呂 1720~1783)의 《이참봉집(李參奉集)》이다.
“백사폭포 위에 허씨의 모정(茅亭)이 있다. 편액은 간정료(看鼎寮)였다 ··· 여럿한테서 들으니 허선생은 자유로운 선인(仙人)이다.” 
박규수(朴珪壽 1807~1876)의 기록에는 간정료가 백석정으로 바뀌었다.
“1820년 당시 터만 남아 있었다. 정자이름은 백석정이며 원래 허진인(許眞人) 살았다.
세상에 전하기를 백석정은 허도사가 단약을 만들던 곳(白石亭 相傳 爲許道士鍊丹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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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터와 육각정 주춧돌, 사진 필자 제공] 


 
기록자들은 허씨라는 인물을 도사(道士) 혹은 진인(眞人)이라고 표현했다. 허씨가 백석동천 별서의 주인이었으며 차를 즐기면서 불로장생의 단약을 만들던 도가(道家)계열의 인물로 추정했다. 정(鼎)은 세발 달린 솥을 말한다. 차를 덖거나 약재를 달일 때 사용하던 대형 솥이다. 또 전하는 말에 의하면 허씨의 별호가 연객(煙客) 또는 연옹(煙翁)이었다고 하니 애연가 이미지까지 추가해도 좋겠다.
 
백사실 별서터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추사(1786~1856 김정희) 선생이 매입한 이후의 일이다.
친구인 금헌(今軒) 성진경과 나눈 시(詩)에서 “선인이 살던 백석정을 오래 전에 사들였다. 백석정은 나의 북쪽 별장을 말한다.(舊買仙人白石亭 謂余北墅 농막 서)”라고 했다.
또 당시 정치적 실세이며 추사의 후견인 역할까지 했던 김유근(1785~1840)에게 보낸 편지에는 “부친 김노경께서 별서에서 며칠 바람을 쐬실 생각이었다.”고 썼다.
 
백석정을 북쪽별서라고 한 것은 성동구 금호동 그리고 경기도 과천 두 군데에 이미 별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답게 별서사랑이 유별났다. 모르긴 해도 아버지가 아들의 경제적인 부담까지 일부 덜어줬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백석정 별서를 ‘산루(山樓)’라고 하여 강가 혹은 평야지대에 있는 다른 별서와 표현을 달리하며 구별했다. 1830년대에 600여평의 규모를 자랑하는 별장으로 완성되었다. 김노경(金魯敬1766~1837)은 영남관찰사 시절 화재를 당한 합천 해인사 대웅전을 복원할 때도 크게 후원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후에도 별서의 주인은 거듭 바뀐다. 한 때는 홍우길(洪祐吉1809~1890)이 주인노릇을 했고 등기부 등본에는 이인영(李寅榮 전주이씨 성산군파 후손으로 추정)이 1918년까지 소유했다고 한다. 1917년 대대적으로 보수한 덕분에 1967년경까지 존립했으나 이후 관리소홀로 완전히 무너졌다. 연못의 정자는 6.25 때 없어졌다. 1968년 김신조 사건 후 이 일대는 청와대 경호 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일반인의 출입을 금했다. 2007년 부분 개방되면서 다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5년 ‘사적지’로 지정되었고 2008년 ‘명승지’로 추가 지정했다. 2010년 우물터를 확인했고 2019년 이후 관리인을 두고서 유적지를 보호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어쨋거나 좋은 터는 사연이 많기 마련이다. 허(許)도사의 은둔지로 시작되었고 언젠가 이항복의 이름이 소리 소문 없이 얹혀졌다. 추사선생을 거쳐 홍우길 이인영으로 손바꿈을 했다. 정부수립 이후 서울시 소유과정을 거치면서 주민들의 산책로와 공원이 되었다. 백사실 별서구역은 사유지가 공유지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앞으로도 많은 변화들이 한 켜 한 켜 쌓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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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석축 등이 남아  있다/ 사진 필자 제공]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연구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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