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정권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예산서를 읽는 것이다. 그러나 예산서는 결과물이다. 그보다 먼저 읽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그 정권의 경제사령탑이 사용하는 언어다. 언어는 철학을 담고, 철학은 정책을 낳는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1년 동안 경제정책의 언어를 가장 많이 생산한 인물은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었다. 정책실장은 장관도 아니고 선출직 정치인도 아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대통령의 경제철학을 정책으로 번역하는 자리다. 시장은 그의 발언을 통해 정부의 의도를 읽고, 기업은 그의 말 속에서 미래의 정책 방향을 가늠한다.
지난 1년 동안 김용범 실장의 발언은 적지 않은 화제를 낳았다. 어떤 발언은 미래비전으로 평가받았고, 어떤 발언은 시장과 국민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그의 어록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재명 정부 경제정책의 철학과 리스크가 함께 보인다. 김용범 어록을 관통하는 공통된 문제의식은 비교적 명확하다.
첫 번째는 AI 국민배당금 논란이다. 김 실장은 AI 산업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초과이익과 초과세수를 국민 전체와 공유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았다. 그의 문제의식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AI는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앞으로 전기나 인터넷처럼 국가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가 될 가능성이 높다. 국가가 대규모 재정을 투입해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전력망을 확충하며 인재를 육성한다면 그 성과를 국민과 공유하자는 논리다.
찬성론자들은 이를 21세기형 사회계약으로 평가한다. 미국 알래스카주의 석유배당금, 노르웨이의 국부펀드처럼 AI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부를 미래세대와 국민 모두의 자산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AI 시대에 생산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지만 소득과 자산은 일부 기업과 일부 계층에 집중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국가 차원의 분배 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자유시장경제론자들은 전혀 다른 시각을 제시한다. 그들은 혁신의 핵심은 위험을 감수하는 투자라고 본다. 성공했을 때 이익을 사회가 나누자고 한다면 실패했을 때 손실도 사회가 함께 부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기업의 성공을 국가가 일정 부분 회수하는 방식은 결국 투자 유인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AI 국민배당금은 혁신의 과실 공유라기보다 사실상의 준(準)횡재세 또는 국가개입 확대의 신호로 비친다.
두 번째 논란은 ‘3고는 성공의 비용’ 발언이다. 김 실장은 경제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금리, 고물가, 고환율 현상을 일정 부분 성공의 비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거시경제 관점에서 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아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자금 수요가 증가하고 물가 압력이 생길 수 있다. 투자와 소비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금리도 상승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 들은 메시지는 달랐다. 당시 많은 가계는 주택담보대출 이자와 생활물가 상승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부가 말하는 거시경제적 낙관론과 국민이 체감하는 현실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감이 존재했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정부가 경제를 설계할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에 빠질 위험을 경고했다. 시장은 수많은 개인의 선택이 만들어내는 자생적 질서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성공의 비용’이라는 표현은 국민의 고통을 지나치게 추상화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경제는 숫자로 설명할 수 있지만 국민은 체감으로 판단한다. 성장률이 올라가도 생활이 나아지지 않으면 국민은 성장을 실감하지 못한다. 이 논란은 정책의 방향보다 정책의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준 사례다.
여기서 우리는 170여 년 전 산업혁명기의 영국으로 잠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찰스 디킨스는 소설 『힘든 시절』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묘사한다. 교사는 소녀 시시에게 ‘5천만 파운드를 가진 나라’를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그러자 시시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는다. "누가 그 돈을 가지고 있는지, 내 몫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면 그 나라가 부유한지 알 수 없어요."
산업혁명으로 세계 최강국이 되어가던 영국 사회를 향한 통렬한 질문이었다.
놀랍게도 이 장면은 오늘날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정부는 성장률과 수출, 주가와 AI 투자 규모를 말한다. GDP는 증가하고 국가 경쟁력 순위도 올라간다. 정부는 AI 3대 강국을 이야기하고, 기업들은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첨단 반도체 투자를 발표한다. 그러나 국민은 다른 숫자를 본다. 마트 물가를 보고, 전세금을 계산하고, 대출이자를 걱정하며, 자녀의 취업 가능성을 생각한다. 정부가 보는 경제와 국민이 사는 경제 사이에 간극이 커질 때 ‘호경기’라는 발표는 오히려 냉소의 대상이 된다. 숫자로 측정되는 번영과 삶으로 체감되는 번영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AI 국민배당금 논란도, 3고는 성공의 비용 논란도 결국은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 성장의 과실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디킨스의 시시가 던진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국가가 부유해졌다는 사실만으로 국민이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다. 국민은 GDP에 투표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투표한다.
세 번째는 최근 가장 큰 관심을 모은 보유세와 거래세 논쟁이다. 김 실장은 거래세를 낮추고 보유세를 정상화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경제학 교과서 관점에서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거래세는 시장 유동성을 위축시키고 자산 이동을 어렵게 만든다. 반면 보유세는 상대적으로 경제 왜곡 효과가 적다는 것이 주류 경제학의 설명이다. 실제로 많은 OECD 국가들이 거래세보다 보유세 중심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교과서보다 복잡하다. 한국 국민의 자산 대부분은 부동산에 묶여 있다. 특히 은퇴세대에게 주택은 단순한 투자자산이 아니라 노후생활의 안전판이다. 자유시장경제론자들은 이미 취득 과정에서 세금을 냈고 자산 형성 과정에서도 다양한 세금을 부담했는데 보유 자체에 추가적인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이중과세적 성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진보경제학자들은 토지와 주택은 공급이 제한된 공공적 성격의 자산인 만큼 적정 수준의 보유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결국 이 논쟁은 세금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의 역할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이다. 국가가 자산 증가의 과실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인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AI 국민배당금, 3고 논란, 보유세 논쟁이 서로 다른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철학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국가는 성장의 촉진자일 뿐 아니라 성장의 결과를 조정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지난 1년 동안 김용범 어록이 반복적으로 보여준 핵심 메시지다. 이 철학은 AI 시대에 맞는 새로운 국가 역할을 모색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시장의 자율성과 기업의 투자 의욕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안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2년 차에 접어들었다. 여기서 대통령에게 한 가지 제언을 드리고 싶다. 이제 정부의 목표를 ‘AI 3대 강국’에서 ‘AI 생산성 강국’으로 한 단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AI 3대 강국은 기술력과 산업 규모 중심의 목표다. GPU를 얼마나 확보했는지, 데이터센터를 얼마나 건설했는지, AI 기업의 시가총액이 얼마나 되는지를 중시한다.
그러나 국민이 체감하는 국력은 그것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AI 생산성 강국은 AI가 실제 국민경제 곳곳에 스며들어 생산성을 높이는 나라를 의미한다. 제조업의 생산성이 올라가고, 병원의 진료 효율이 향상되며, 농업과 물류가 혁신되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자가 AI를 활용해 수익을 높이는 나라다. 다시 말해 AI 강국은 기술을 많이 보유한 나라이고, AI 생산성 강국은 기술을 가장 잘 활용하는 나라다.
지금 세계는 AI 기술 경쟁에서 AI 활용 경쟁으로 넘어가고 있다. 미국이 AI를 만들고 중국이 AI를 확산시키고 있다면 한국은 AI를 활용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국가 모델을 만들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지원금이 아니라 DX(디지털 전환), AX(AI 전환), RX(로봇 전환)를 전 산업에 확산시키는 것이다.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 병원, 학교, 농어촌, 지방정부까지 AI 활용 능력을 갖추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한 생산성 혁명이다.
국민배당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소득의 증가이고, 보유세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자산 형성 기회의 확대이며, 성공의 비용보다 중요한 것은 성공의 체감이다. 경제정책은 결국 신뢰의 문제다.
김용범 실장의 지난 1년은 국가가 시장보다 조금 더 앞에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실험이었다. 앞으로의 1년은 시장과 국민이 그 비전에 얼마나 공감하고 동참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AI 시대의 승자는 가장 많은 기술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 가장 많은 국민이 기술의 혜택을 누리는 나라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야말로 현 정부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AI 생산성 강국의 모습일 것이다.
<표> 김용범 어록 일지
2025년 7월 “잠재성장률 추세 반전” — 성장국가 선언
2025년 8월 "AI 3대 강국" — 국가 AI 비전 제시
2025년 10월 "국익 중심 통상" — 경제안보형 통상전략
2026년 1월 "피크 코리아를 넘자" — 성장 낙관론
2026년 5월 "AI 국민배당금 검토" — 성장 과실 공유 논쟁
2026년 5월 "3고는 성공의 비용" — 거시경제와 민생 체감 충돌
2026년 6월 20일 "거래세 인하, 보유세 정상화" — 자산세 철학 논쟁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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