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에 ‘야자’를 하고, 밀레니엄을 넘겨 수능을 치른 우리는 ‘이해찬 세대’라 불렸다. 누군가에게는 개혁의 이름이었으나 우리에게는 낙인이었다. 그를 보낸 지금, 애도보다 묘한 감정이 먼저 복받친다. 우리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움과 원망에 가까웠다.
1998년 그는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시대”를 말했다. 보충수업과 야자가 짓누르던 교실엔 잠시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러나 2001학년도 수능은 ‘물수능’이라는 이름을 남겼고, 이듬해 시험은 난도가 급격히 오르며 ‘불수능’이 됐다. 시험은 흔들렸고 전형은 연거푸 바뀌었다. 우리는 그 변동의 한가운데 놓였다.
‘변별력 없다’는 말은 곧 ‘실력 없다’는 낙인으로 번졌다.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라는 조롱이 세대 전체를 따라다녔다. 정책의 취지따윈 알 길도 없던 우리는 그 변화를 고스란히 삶으로 떠안았다. 우리는 시험을 설계하지 않았으나 평가의 대상이 됐다.
화살은 당연히 그를 향했다. 그는 관료의 뒤에 숨지 않았다. 정책의 얼굴로 전면에 섰다. ‘이해찬’이라는 이름은 교육 정책의 대명사이자 분노의 과녁이었다. 그럼에도 타협이나 검토, 백지화라는 단어는 그의 선택지에 없었다. 한 번 던진 정책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 선명함은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졸업했고, 취업했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소주잔을 기울이다가도 입시 이야기가 나오면 그의 이름이 먼저 불쑥 튀어나왔다.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안에는 억울함과 자존심이 섞여 있었다. 수십 명의 교육 수장이 스쳐 갔지만 이름을 남긴 이는 많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욕하면서도 기억했다. 그만큼 선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실패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수능 한 번으로 줄을 세우던 구조에 작게나마 균열이 생겼고, 수시는 제도로 공고히 자리 잡았다. 적어도 시험 중심 체제를 그대로 두지는 않겠다는 선택은 있었다. 다만 그 전환의 비용을 우리 세대가 먼저 감당했을 뿐이다.
그가 떠난 지금, 우리 사회의 교육은 어디에 서 있는가. 사교육은 억제해야 하고, 공교육은 살려야 하며, 기초학력은 높여야 하고, 줄 세우기는 완화해야 한다. 공정성도 확보해야 하고, 다양성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요구들은 서로 긴장한다. 그래서 정책은 점점 조정과 타협의 언어로 흐른다. 누구의 것도 아닌 정책은 길을 잃기 쉽다. 세대라는 이름만 안 붙을 뿐 지금이라고 교육정책의 피해자가 없을까.
그 시절 ‘단군’까지 소환되며 조롱받던 소년·소녀들은 어느덧 자녀의 입시를 고민하며 다시 교육의 격랑 앞에 서 있다. 우리가 겪었던 혼란을 아이들에게만은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갈팡질팡하는 정책을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미래를 준비시켜야 할지 막막해질 때면 20여 년 전 그 이름이 다시 떠오른다. 그것은 상처의 복기이자 지금의 교육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는 질문이다.
선명성은 복잡함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 복잡함 속에서도 무엇을 먼저 할지 정하는 일이다. 이해찬의 정책이 완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무엇을 바꿀 것인지 숨기지 않았다. 그 선택의 비용이 우리 세대에 먼저 집중됐을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그를 미화할 생각이 없다. 책임은 그의 몫이다.
정책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방향을 제시했던 정치인은 드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욕하면서도 기억했다. 갈등을 피하려 모호함 속에 머무는 정치와 달리 그는 상처를 남기더라도 이름을 걸었다. 그 선명함을 남긴 채, 그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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