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정치에서 사과의 무게는 그 이후의 태도로 평가된다. 계엄을 ‘잘못’으로 규정했다면, 그 판단이 요구하는 정치적 책임의 기준 역시 분명해야 한다. 책임을 당 전체로 포괄하는 방식은 통합의 언어일 수 있으나, 동시에 판단의 초점을 흐릴 위험도 안고 있다. 보수정당의 신뢰는 포괄적 수사보다 명확한 기준과 일관성에서 나온다.
해외 보수정당의 경험은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영국 보수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놓은 에드먼드 버크는 “국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계약”이라고 했다. 권력은 순간의 편의가 아니라 축적된 질서와 책임 위에서 행사돼야 한다는 뜻이다. 영국 보수당이 위기 국면마다 질서와 절차를 앞세워 자정 능력을 강조해온 배경도 여기에 있다.
독일의 기독민주당(CDU) 역시 보수의 기준을 상식과 책임에서 찾아왔다.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위기 때마다 “정치는 감정이 아니라 규칙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난민 문제나 연정 갈등 과정에서 단기적 지지율 하락을 감수하면서도 헌법과 제도적 틀을 우선한 선택은, 보수가 국가 운영의 안정성을 중시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다.
국내에서도 상식의 힘은 반복적으로 확인됐다.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는 정치적 부담이 컸지만, “비정상은 정상화해야 한다”는 상식의 언어로 추진돼 시간이 지날수록 정당성을 얻었다. 반대로 절차와 원칙을 건너뛴 권력 행사는 단기 성과와 무관하게 결국 정치적 비용으로 돌아왔다. 보수의 경쟁력은 속도가 아니라 신뢰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장 대표가 제시한 청년 의무 공천제, 전문가 네트워크 강화, 약자와 세대를 아우르는 연대 구상은 변화하는 사회에 대한 대응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정책 경쟁을 전면에 내세운 점은 정쟁 중심 정치에 대한 반성으로 읽힌다. 다만 제도는 설계보다 운용이 중요하다. 청년 참여가 형식에 그치지 않으려면 공정한 경쟁과 실질적 권한이 보장돼야 하고, 전문가 영입 역시 당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실제 기능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권력에 대한 태도다. 건전한 보수정당의 핵심 조건은 권력과의 건강한 거리 유지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결과보다 절차를, 승리보다 규칙을 우선해야 한다. “권력은 견제받지 않을 때 부패한다”는 오래된 격언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다. 보수는 이 원칙을 가장 엄격하게 적용할 때 힘을 얻어왔다.
당명 개정이나 정치 연대 역시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이름을 바꾼다고 가치가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법치, 책임 정치, 절제된 권력 행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라는 상식적 기준이 분명할 때 연대도 의미를 갖는다.
국민은 선언보다 선택을 본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불리한 상황에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지, 그리고 권력 앞에서 더 신중해지는지를 지켜본다. 보수의 힘은 강한 언어가 아니라 상식에서 나온다. 사과는 출발점이다. 그 이후의 기준과 선택이 건전한 보수정당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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