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위기의 한국 경제, '정치 복원'에 달렸다

임병식 논설위원
[임병식 순천향대 초빙교수]

한국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을 피할 수 있을까.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시작하는 요즘 ‘일모도원(日暮途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다 보면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는 말을 실감한다. 이러다 일본이 간 길을 답습하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이 문득문득 고개 든다. 경제를 견인해야 할 정치가 해결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한국은 평균수명 44세, 영아사망률 1000명 당 102명(세계 2위), 13세 이상 문맹률 77%였다. 수출품의 40%는 말린 오징어였고, 조세 수입 비중은 15%에 그쳤다. 전력 자급률 또한 30%대로 사방은 암흑이었다. 이를 두고 맥아더는 “이 나라가 다시 일어서려면 100년은 걸릴 것”이라고 비관했다. 영국 더 타임스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보다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게 합리적이다”라고 비꼬았다. 한국 경제는 조롱을 뒤로한 채 70년 압축 성장을 이뤘다. GDP는 477억원에서 2560조원으로 뛰었고 반도체와 조선, 방위산업은 세계 1위에 올랐다. AI시대, 한국 반도체는 호황을 맞았다. 문화 파워 또한 세계인의 일상을 뒤흔들고 있다.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케이팝 데몬 헌터스’, 그리고 아이돌 그룹 ‘BTS’와 ‘블랙핑클’로 대표되는 K팝과 K드라마는 도저(到底)한 한류를 만들었다. 문제는, 이 모든 성취가 ‘한때 영광’에 그칠 것이란 우려에 있다.

1980년대 미국과 함께 G2로 불렸던 일본은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30년 넘게 저성장과 디플레이션, 소득 정체에 있다. 반도체와 가전제품, 자동차 등에서 일본을 모방하며 추격한 한국은 ‘한강의 기적’으로 불릴 정도로 고도 성장했다. 그러나 잠재성장률은 2% 아래로 추락, 수년째 저성장 늪에 빠졌다. 저출생·고령화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규제와 기득권 때문에 혁신 동력을 잃었다. 새 정부 출범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일본의 길을 답습하나’라는 회의감이 자욱한 이유다. 극한 정쟁 속에서 민생과 경제는 뒷전으로 밀렸다.

G2 일본의 저력은 기술과 제조업, 그리고 사회 안정이었다. 하지만 위기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에서 시작했다. 위기 앞에서 결단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할 ‘정치 엔진’이 약화돼 구조개혁은 늦어졌고, 폐쇄 사회로 내달았다. 기업은 현금을 쌓고, 가계는 지갑을 닫았다. 일본 경제는 영광을 뒤로한 채 주저앉았다. 에이미 추아는 <제국의 미래>에서 강대국의 흥망을 ‘개방과 포용’ 대 ‘배타와 폐쇄’로 파악했다. 일본의 불황 또한 정책 실패와 함께 배타적이며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가 망가지는 동안 정치는 퇴보했다.

일본과 유사한 한국의 위험 신호는 곳곳에서 포착된다. 첫째, 내부 역동성이 떨어졌다. 트럼프 정부에서 보호무역이 거세지는데도 정치권은 반목을 멈추지 않고 있다. 둘째, 계층 이동 사다리가 끊어졌다. 청년들은 “희망이 없다”며 절규하는데 정치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셋째, 양극화와 계층 갈등 심화다. 정치 실패와 불신에서 기인한 양극화는 치유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전 세대가 ‘나보다 잘사는 자식 세대’를 위해 땀 흘렸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보다 잘살아야 한다’며 경쟁 논리에 몰두하고 있다. 끝으로 반복되는 진영 싸움이다. 정책은 ‘선거 전략’으로 전락한 지 오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복과 증오를 반복하고 있다. 한국 경제는 ‘퍼펙트 스톰’에 갇혔다.

지난 반세기 넘게 한국은 교육과 근면, 우방과 동맹, 열린 경제를 토대로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고비마다 중요한 ‘정치적 결단’이 뒷받침됐다. 갈등을 조정하고 규칙을 세우는 정치가 있었다. 농지개혁, 의무교육, 경제개발 5개년 계획, 87년 민주화, 한·미 FTA 체결, 일본 문화 개방 등 결단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끌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개방하지 않고 발전하는 나라는 없다”며 FTA에 부정적인 지지층을 설득했다. 경제와 문화에서 개방은 새로운 기회와 산업 질서를 만든다. 공동체를 위한 결단과 사회적 합의는 정치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과거 성공에 안주해 기득권을 고집하고, 변화에 따른 비용을 후대에 떠넘기면 국가는 천천히 늙는다. G2에서 ‘잃어버린 30년’으로 일본 경제가 그랬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게 아니다. 누구도 결단하지 않는 정치 아노미 상태가 지속되면서 서서히 망가졌다. 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국 정치의 작동 방식을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

첫째, ‘안정적 정치’다. 안정은 장기 집권이 아니라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의 큰 방향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연금·노동·교육·이민·지역 균형 등 장기 과제는 진영을 초월해 정치적 합의를 이뤄야 한다. 둘째, 양극화를 줄이는 정책이다. 복지 확대가 답은 아니다. 주거·교육·노동시장 이중구조를 손보지 못하면 분노는 확대된다. 양극화 해소에 여야는 머리를 맞대야 한다. 셋째, 진영 싸움을 종식해야 한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순간 협치는 불가능하고, 갈등은 상존한다. 넷째, 과감한 규제 완화다. 규제는 안전망이지만, 변화 속도보다 느릴 경우 성장동력을 저해한다. 끝으로 진정한 ‘사회통합’이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지만, 갈등을 다루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정책은 숫자와 제도이지만, 이를 지속하는 건 공동체 신뢰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정치를 끝내고 장기 과제를 ‘함께’ 고민하는 정치 복원은 핵심이다.

‘정답지(선진국 모델)’를 베끼는 성장 모델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AI·탈탄소·지정학 리스크가 동시에 밀려오는 상황에서는 ‘퍼스트 무버’가 필요하다. 정치가 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장기 생산성을 우선하고, 불편한 개혁을 ‘내 편의 희생’으로 감당하고, 국가 역량을 한데 모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진솔하게 호소하고 공감대를 얻어야 한다. 나아가 성장 과실은 공정하게 나누되, 변화에 따른 비용은 공평하게 부담하자. 그럴 때 개방과 혁신에 필요한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단, 조건이 있다. 정치의 역할이다. 이익은 공정하게 나누고, 갈등은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며, 장기 목표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는 정치다.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는 ‘일모도원’은 어쩌면 “늦을수록 선택지는 나빠진다”는 걸 뜻한다. 진나라 재상 이사(李斯)는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임병식 필자 주요 이력

▷순천향대 초빙교수 ▷전 국회의장실 부대변인 ▷전 국회의장 정무비서관  ▷전 국가균형발전위원회 국민소통위원 ▷국가유산청 정책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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