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단순하다. 그 제도가 본래 목적에 맞는지, 그리고 국민 상식에 부합하는지다. 최근 수능 영어 논란은 이 기본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어는 언어 능력을 기르기 위한 도구여야 하지만, 지금의 제도는 오히려 영어를 넘기 힘든 장벽으로 만들고 있다.
올해 수능 영어 시험을 둘러싼 논란은 국내에 그치지 않았다. 영국 BBC는 시험을 “고대 문자를 해독하는 수준”에 비유했고, 미국 뉴욕타임스는 칸트 철학 지문과 게임 용어 문항을 독자에게 직접 풀어보라고 제시했다. 한국의 영어 평가가 실제 언어 사용 능력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가 해외 언론의 시선에도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명확하다. 영어를 언어로 가르치고 평가하고 있는가, 아니면 문제풀이 과목으로 취급하고 있는가다. 고교 현장에서는 고난도 독해와 객관식 변별력이 중심이 됐고, 말하기·듣기·쓰기 등 실제 소통 능력은 부차적인 영역으로 밀려났다. 높은 등급을 받아도 외국인 앞에서 기본적인 의사 표현조차 어려운 사례가 적지 않은 이유다. 시험은 ‘정답 고르기 기술’을 측정했을 뿐, 언어 사용 역량을 길러주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 1등급 비율이 3%대로 급감한 것은 절대평가가 사실상 상대평가처럼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난이도 조절 실패를 넘어, 제도의 약속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원칙을 잃은 절대평가는 이름만 남은 제도에 불과하다.
국제 지표 역시 경고음을 낸다. EF가 발표한 2025년 영어능력지수에서 한국은 비영어권 64개국 중 48위에 머물렀다. 교육 투자 규모와 사회적 관심을 고려하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결과다. 이는 영어 교육의 양적 투자가 실제 활용 능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험 중심, 독해 편중 구조가 장기간 누적된 결과다.
AI 시대는 이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통·번역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서 영어 학습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 역량과 디지털 문해력을 갖춘 일부에게만 AI가 기회로 작동하는 격차 확대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 기본 역량이 취약한 상태에서 AI에만 의존하면, 교육 격차는 완화가 아니라 고착될 가능성이 크다.
방향은 분명하다. 중등 영어 교육은 독해·문법 중심의 ‘정답 맞히기’에서 벗어나 말하기·듣기·읽기·쓰기의 통합적 언어 능력을 기르는 구조로 전환돼야 한다. AI 도구 역시 사교육의 전유물이 아니라 공교육 안에서 체계적으로 활용돼야 한다. 다만 기기·네트워크·교사 연수 등 기본 인프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AI는 또 다른 불평등의 통로가 될 뿐이다.
평가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AI가 그럴듯한 답안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결과물만 채점하는 평가는 한계가 분명하다. 사고 과정, 근거 제시, 오류를 가려내는 능력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옮겨가야 한다.
수능 영어 절대평가는 다시 기본 성취를 확인하는 장치로 돌아가야 한다. 필요 이상의 난이도는 영어에 대한 혐오만 키우고, 사교육 시장만 확대할 뿐이다. 이는 교육 정책의 원칙에도, 국민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영어는 AI와 글로벌 협업 시대의 기본 언어다. 시험이 학생들에게 영어를 ‘기회’가 아닌 ‘장벽’으로 경험하게 만든다면, 그 손실은 개인을 넘어 국가 경쟁력으로 되돌아온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구호가 아니라 기본으로 돌아가는 결단이다. 영어를 언어로 가르치고, 원칙에 맞게 평가하는 것. 교육 정책 역시 기본·원칙·상식 위에서만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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