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헌법 제1조 ①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정하고 있다. 헌법 가장 첫 조의 가장 첫 항목을 그렇게 정한 데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이 우리에게 그토록 중요하다는 의미다. 요즘 더불어민주당의 정치 행태는 헌법 제1조 ①항의 의미와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헌법 수호에 앞장서야 할 집권 여당이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민주공화국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을 합친 말이다. 민주주의의 뜻이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공화국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공화국은 생소하고 낯선 말이다. 공화국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이론적, 역사적 설명이 필요하다.
‘공화국(共和國, republic)’)이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국가’를 뜻한다. ‘공적인 것’ 또는 ‘공적인 일’을 의미하는 라틴어 ‘res public’에서 나왔다. 공공의 이익이란 특정 집단이나 계층, 정파의 이익이 아닌 국민 전체의 이익을 말한다. 공화국은 국민 전체의 이익을 지킨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특별한 제도적 장치를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권력 분산을 통한 상호 견제와 균형이다. 권력이 어느 한쪽으로 집중되면 그 권력을 남용 또는 악용해 국민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이기적· 당파적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한 장치가 권력 분산 및 견제와 균형 체제이다.
‘공화국’ 핵심은 권력 분할과 상호 견제
역사상 대표적인 공화국 체제는 기원전 509년부터 서기 287년까지 800년 이상 존속했던 로마 공화국이다. 로마 공화국의 제도적 특징은 이중삼중의 권력 분할과 견제 시스템이다. 군주제의 군주와 같은 정무관, 귀족을 대표하는 원로원, 평민을 대표하는 민회와 호민관이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해 어느 누구도 권력 전체를 장악하지 못하게 했다. 정책 명령권을 가진 정무관은 1년 임기로 민회에서 선출된 2명이 공동으로 맡았다. 2명이 서로에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 어느 한 명도 전횡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
원로원은 정무관이 제출한 모든 법안에 대한 자문과 심의를 맡았다. 이를 통해 군대와 재정을 통제했다. 민회는 선거, 입법, 사법 기능을 맡았다. 원로원을 거친 모든 법안은 민회 심의에 넘겨졌다. 호민관은 10명으로 민회에서 임명됐다. 호민관들은 원로원의 결의나 정무관의 행위 중에서 평민의 이익을 해치는 것에 대해 거부할 권한을 가졌다. 심지어 자신들을 임명한 민회가 통과시킨 법안에 대해서도 평민 이익에 반한다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역사>라는 고전을 남긴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기원전 200~서기 118년)는 고대 로마가 성공한 핵심을 권력 분할을 통한 견제와 균형 시스템에서 찾았다. 이 시스템 덕에 정무관이나 귀족이나 평민 중 누구도 공공의 이익, 즉 국민 전체의 이익을 해치면서 이기적이거나 당파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자유롭고 안정적인 정부가 지속될 수 있었다고 했다. <군주론>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1469~1527)도 로마 공화정을 가장 이상적인 체제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민주공화국을 성문 헌법에 처음 구체적으로 실현한 나라이다. 국가 권력을 대통령, 의회, 사법부로 분할했다. 이른바 삼권분립이다. 의회는 다시 하원과 상원으로 나뉬다. 하원은 국민을 대표하고 상원은 50개 주(州)를 대표한다. 미국 대통령은 옛날 유럽 군주제 국가의 군주를 모델로 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와 달리 대통령은 의회와 사법부의 견제를 받는다. 의회를 하원과 상원이라는 양원제로 한 데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들어 있다. 하원은 인구 비례로 의원을 선출하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지역이 더 큰 권력을 갖게 된다. 상원은 의원을 인구에 관계없이 주별로 2인씩 선출하기에 모든 주가 동등한 권력을 갖는다. 하원을 통해 국민 뜻을 반영하되 상원을 통해 인구가 많은 지역이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미국 권력 분립 체제의 핵심은 사법권이다. 미국 연방법원은 의회가 만든 법률은 물론이고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서까지 위헌· 위법 여부를 심사한다. 위헌이나 위법으로 판결나면 그 정책은 효력을 잃는다. 요즘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명령을 남발해 황제처럼 군림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를 그나마 견제하는 곳이 연방법원이다. 연방법원은 트럼프가 발동한 행정명령 다수에 대해 위헌· 위법 판결을 내렸다. 글로벌 관세 부과, 출생 시민권 금지,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위원의 임기 중 해임, 범죄 진압을 이유로 한 방위군 동원 명령 등이다. 특히 임기가 보장된 중앙은행 위원 해임은 위헌이라는 결정에 따라 그 위원은 위원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트럼프의 금리 인하 압력에 저항했던 위원이다. 현재 연방대법원에서 여러가지 행정명령들에 대해 최종적인 위헌·위법 여부를 심의 중에 있다.
다수의 독재·사법권 무시, ‘공화국 원리’ 위배
우리는 해방 이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제헌 헌법에 미국을 본뜬 민주공화국 체제를 도입했다. 입법, 행정, 사법권이 서로 견제하게 했다. 로마 공화국이나 미국 헌법에 담긴 정신과 똑같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권력 분할과 상호 견제와 감시 기능이 그런대로 작동해 왔다.
그러나 요즘 더불어민주당은 권력 분할, 견제와 감시 체제를 흔드는 행위를 남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의회 다수 권력을 사용한 사법권 흔들기이다. 대법원이 지난 5월 당시 이재명 대선 후보에게 대선을 코앞에 두고 공직선거법 유죄 취지 판결을 했다고 조희대 대법원장 사퇴와 탄핵을 주장한다.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소문에 불과한 의혹을 씌워 청문회를 하겠다고 한다. 내란 재판에 시간을 끈다며 내란특별재판부를 만들겠다고 한다. 국정감사장에 조희대 대법원장을 불러내 ‘이재명 판결’을 문제 삼았다. 심지어 대법관들이 이재명 재판 서류를 제대로 읽었는지 점검하겠다며 서류 열람 기록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우리 헌법 제 101조는 ‘사법권은 법원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법권은 법원 권한이기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사법권 독립’ 조항이다. 사법권은 유·무죄를 판결하는 권한만을 뜻하지 않는다. 재판 일정 결정, 재판부 구성, 사건 배당 등 재판과 관련한 모든 권한을 포괄한다. 대법원이 이재명 후보에게 언제, 어떤 판결을 할지도 사법권의 일부이다. 따라서 왜 ‘대선을 앞두고’ ‘유죄 취지 판결을 했느냐’고 문제 삼는 것은 사법권 독립을 침해하는 일이다. 대법관들의 재판 서류 열람 기록을 제출하라고 하는 것은 더욱더 그렇다. 민주당의 재판 간섭은 삼권분립이라는 공화국의 원리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일이다.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하게 해야지 왜 법원이 끼어드느냐며 대선 개입이라고 하는 주장도 말이 안 된다. 선거는 대통령 자질 여부를 따진다. 판결은 대통령 피선거권이 있는지를 따진다. 피선거권이 없으면 선거에 나갈 수 없다. 이게 법치주의이다. 민주주의는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민주’가 ‘법치’ 위에 있는 게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입법부는 최고 권력인 국민이 선출한 권력’이라며, ‘임명된 권력인 사법부는 선출된 권력인 입법부가 만들어준 체계 안에서 일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사법권도 헌법이 부여한 권력이다. 헌법은 ‘최고 권력’인 국민의 뜻이 담긴 문서이다. 사법권이 선출되지는 않았지만 국민이 헌법을 통해 부여한 권력이라는 점에서 민주적 권력이다. 입법권과 사법권 모두 국민이 부여한 권력인 만큼 서로 간에 서열은 있을 수 없다. 서로 견제하고 감사해 균형을 이루는 관계일 뿐이다. 입법권이 사법권에 위에 있다는 주장은 권력 분할을 통한 견제와 균형이라는 공화국 원리에 어긋난다.
더불어민주당은 제1야당이 관행적으로 맡아온 국회 법사위원장을 자기들이 차지했다. 법사위는 모든 법률안이 최종 관문인 국회 본회의로 넘어가기 직전에 마지막 심의를 하는 곳이다.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하면 법률 제정이나 개정이 불가능하다. 입법 독주를 할 수 없다. 제1야당이 법사위원장을 맡게 한 것은 국회 입법권을 다수당과 소수당으로 분할해 다수당의 횡포와 독주를 막기 위한 견제 장치이다. 민주당이 법사위원장을 차지한 것은 이 견제 장치를 무력화하는 일이다. 이 역시 공화국 원리에 어긋난다.
공화국 원리 깨지면 권력 남용 불가피
공화국이 권력 분할을 통한 상호 견제와 균형 체제를 핵심으로 하는 이유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에서이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다. 권력과 이익을 탐하는 존재이다. 권력을 쥐면 남용하기 마련이다. 권력 남용은 정의 실현을 어렵게 하고, 비리와 부패를 가져온다. 궁극적으로 국민 생활에 악영향을 미친다. 경찰이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다면 그 권력을 남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경찰이 비대해진 권력을 정권을 위해 쓸 수도 있다. 민주당은 개혁을 위해 입법 독주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민주당이 견제를 받지 않으면 정파적 이익이나 이기적 이익을 떠나 국민 이익을 위해서 일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자기들 지지층만 보고 강경 일색으로 나아간다는 비판이 많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다수가 지배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다수의 권력을 방치하면 권력 남용과 악용이 생기기 마련이다. 공화국은 권력을 분할하고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다수가 권력을 남용 또는 악용하지 못하게 한다. ‘민주’를 존중하되 일정한 제한을 가해 민주의 부작용을 막는다. 우리 헌법 제1조 ①항에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하지 않고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한 데는 이런 깊은 뜻이 담겨 있다. 더불어민주당식 정치는 ‘민주’일지는 몰라도 ’공화국’과는 거리가 멀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정치학과ㆍ대학원 정치학 석사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미디어본부장 ▶원주 한라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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