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용산의 한 언덕 위, 한강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새남터'가 있다. 이곳은 한국 천주교 신앙의 피와 눈물이 서린 성지로, 조선 후기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의 현장이다. 1846년, 스물다섯의 청년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이 자리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그와 함께 100여 명의 신앙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생명을 바쳤다.
지금의 새남터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관리 아래 성역화되어 있다. 성당과 순교탑, 전시관, 김대건 신부 동상이 조화를 이루며 도심 한가운데서도 깊은 침묵을 품고 있다. 그러나 서울의 심장부에 있음에도 이 성지는 여전히 조용하다. 서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이 연간 2000만 명에 육박하고 있고, 국내 천주교 신자가 600만 명을 헤아리지만, 새남터는 아직 '숨은 성지'로 남아 있다. 서울의 역사와 신앙, 문화가 만나는 이 공간이 도시 행정의 관심 밖에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2027년 세계청년대회(WYD)가 서울에서 열린다. 전 세계 200여 개국의 청년이 모이는 이 행사는 '신앙의 올림픽'이라 불리며,
종교행사를 넘어 도시의 문화·경제·이미지를 바꾸는 계기로 평가받는다. 1989년 산티아고, 1997년 파리, 2011년 마드리드가 그랬듯, 세계청년대회는 개최 도시를 '순례의 도시'로 남긴다. 교황청은 이미 명동성당, 서소문, 절두산, 당고개, 새남터를 잇는 '서울 천주교 순례길'을 공식 순례지로 인준했다. 이제 서울이 이 성지들을 어떻게 품느냐에 따라 2027년 이후의 도시 이미지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서울대교구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새남터를 조심스럽게 운영하고 있다. 상업적 관광화를 경계하는 교회의 입장은 너무나 타당하다. 그러나 신앙이 사람의 발길과 함께 확장되고, 도시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울시가 해야 할 일은 이 성지를 관광지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순수함을 존중하면서도 시민과 세계인이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열린 문화공간' 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몇 가지 구체적 노력이 필요하다. 먼저 외국인 순례객을 위한 다국어 표지판과 모바일 해설 시스템 등 기본적인 안내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또한 효창공원과 용산공원, 한강을 잇는 '평화와 인권의 도보 순례길'을 조성해 신앙과 역사, 생태가 어우러지는 체험형 관광 루트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세계청년대회와 연계한 국제홍보를 강화해야 한다. 나아가 '성 김대건의 길, 서울의 순례길(Seoul Pilgrimage Route)'을 프랑스, 스페인, 필리핀 등 가톨릭권 국가를 중심으로 홍보한다면 서울은 동양의 새로운 순례도시로 자리 잡을 것이다.
서울대교구는 신앙을 지키고, 도시는 그 이야기를 해석하며, 서울관광재단이 언어와 인프라를 지원하는 협력 구조가 필요하다.
이것이 단순한 상업화가 아닌 '공공화'의 방향이다. 성지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시민과 외국인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서울의 품격이 높아질 것이다.
새남터는 서울이 가진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조선의 탄압과 순교, 그리고 신앙의 자유와 화해는 오늘날 인권과 평화의 가치로 이어진다. 이 대비는 서울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강력한 문화서사다. 도쿄의 메이지신궁, 파리의 노트르담, 마닐라의 산아구스틴 성당이 그 도시의 얼굴이듯, 서울은 새남터를 통해 '용서와 신앙,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라는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 수 있다. 이 성지가 세계청년대회의 기억과 함께 남는다면, 서울은 '현대 도시 속의 순례지'라는 독보적 정체성을 얻게 될 것이다.
600만 신자, 2000만 외국인 관광객, 그리고 2027년이라는 세계의 시선이 지금 서울로 향하고 있다. 이제 서울시가 움직여야 한다. 새남터는 과거의 처형장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 생명과 평화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서울시가 이 성지를 도시 브랜드와 문화정책의 한 축으로 세운다면, 서울은 단순한 관광도시를 넘어 하늘과 인간을 잇는 순례의 수도(首都) 로 거듭날 것이다.
새남터의 붉은 흙에는 피가 스며 있지만, 그 피는 시대를 넘어 사랑의 언어가 되었다. 그 사랑을 시민과 세계인이 함께 걸을 수 있는 길로 여는 일을 이제 서울시가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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