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권이 각종 정책 과제를 떠안으며 ‘만능 지갑’ 취급을 받고 있다. 정부가 출연금, 취약계층 금융 지원뿐 아니라 일부 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공동 대응과 피해 배상까지 요구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금융사들의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들어 정부 주도의 금융 지원책이 연이어 추진되고 있다.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유 아래 배드뱅크 재원 마련, 소상공인 금융 지원은 물론 석유화학·철강업계 구조조정 과정에도 은행 자금이 투입될 전망이다. 최근에는 보이스피싱과 같은 사고에 대한 배상 문제까지 은행권이 떠맡는 분위기다.
이 같은 흐름은 은행 본연의 영업 기반에도 영향을 미친다. 은행들은 이미 교육세와 각종 출연금 부담을 안고 있는데 추가로 구조조정 금융 지원이나 피해 배상 책임까지 지게 되면 이익 구조가 더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일각에서는 “모든 사안을 지나치게 금융사에 전가하고 있다”는 불만도 나온다.
보이스피싱 대응과 관련해 은행권은 이미 자체적으로 예방 체계를 마련해 왔지만 여기에 추가 조치까지 더해지고 있다.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이 집계한 피해 예방액은 2023년 1148억9200만원에서 지난해 1248억5900만원으로 늘어나 1년 새 99억6700만원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상거래탐지시스템(FDS) 고도화와 자체 보상제도 운영 등 꾸준한 투자와 대응 노력에 따른 성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고 배상 책임까지 안게 되면서 부담이 더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기에 금융당국 조직개편까지 맞물리면 은행들에 지워진 짐은 더 무거워질 수 있다. 금융당국 조직개편이 마무리되면 금융 정책·감독 기능이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 금융소비자보호원으로 쪼개져 대응해야 할 ‘시어머니’가 넷으로 불어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금융권을 사실상 정책 집행 창구로 바라보는 시각이 계속된다면 금융 안정성과 시장 질서 전반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가 다양한 금융 지원책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명확한 추진 방향성은 아직 나오지 않아 계속 기다리는 상황”이라며 “금융 소비자 보호와 사회적 책임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정책의 필요성과 금융사의 책무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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