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뜬금없는 비상계엄으로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이 이재명 정부 출범으로 안정을 찾아나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를 대신한 ‘국민께 드리는 말씀’에서 “안전과 평화는 국민 행복의 대전제”라며 “안전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 대통령은 “안전이 밥이고, 평화가 경제”라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지 않는 안전사회를 건설”하고,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 번영의 미래를 설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평소 지론인 “아무리 비싼 평화도 전쟁보다 낫다”고 하면서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낫고, 싸울 필요 없는 평화가 가장 확실한 안보”라고 밝혔다.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는 “한미군사동맹에 기반한 강력한 억지력으로 북핵과 군사도발에 대비하되, 북한과의 소통 창구를 열고 대화 협력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겠다”고 약속했다.
탄핵 이후 치러진 지난 대선에서는 ‘내란종식’이 주된 쟁점이었다. 선거 때면 단골로 부각했던 ‘친북좌파’ 논쟁도 없었고 ‘북풍’도 불지 않았다. 북한이 핵무력을 고도화하면서 2023년 말부터 남북관계를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로 보지 않고 ‘적대적 두 국가관계’,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관계’로 규정함으로써, 유력 대선후보들은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북한 위협 억제를 위한 한미동맹 강화에 한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북핵해법으로 ‘북한 핵 위협의 단계적 감축 및 비핵·평화체제를 향한 실질적 진전 달성’을 제시했다. 이 대통령은 대선과정에서 한반도 군사적 긴장 완화와 평화 분위기 조성을 위해 한반도 비핵화 목표 아래 남북관계 복원 및 화해·협력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우발적 충돌방지 및 군사적 긴장완화, 신뢰구축 조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대선공약을 종합하면, 이재명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목표를 유지한 가운데 남북관계를 복원하여 긴장을 완화하겠다는 것으로, 이전 진보정부가 표방했던 ‘평화경제론’과 ‘포괄적·단계적 북핵해법’을 계승하고 있다.
역대 진보정부는 ‘평화경제론’에 따라 대북포용정책(햇볕정책·김대중 정부), 평화번영정책(노무현 정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평화우선의 한반도정책·문재인 정부)를 내세우고 교류협력을 통한 남북사이의 ‘경계 허물기(de-bordering)’에 주력했다. 진보정부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합의한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 특수관계론’과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한 2000년 6·15 공동선언의 합의정신에 따라 민족공조·남북공존을 모색하며 통일보다는 평화를 우선시했다. 한편 보수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정책(이명박 정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박근혜 정부), ‘8·15 통일독트린’(자유의 북진통일·윤석열 정부) 등을 내세우고 ‘자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급변사태와 북한 붕괴에 희망을 걸고 흡수통일을 추진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역대 정부들은 나름의 통일·대북정책과 한반도 구상을 제시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경제협력을 연계하여 남북관계를 풀고자 했지만,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 북미 적대관계 해소 등 ‘근본문제’ 해결을 뒤로 미룬 기능주의 접근의 한계를 보였다. 북한이 남북관계를 “전쟁 중에 있는 두 교전국 관계”로 정리한 것은 한국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있어 정전협정 상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교전관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역대 정부가 ‘북핵해결 우선론’을 내놓고도 북핵 고도화를 막지 못한 것은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등 ‘근본문제’ 해결을 뒤로 미룸으로써 북미 적대관계 해소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북핵해결을 위한 제네바합의(1994), 9·19공동성명(2005), 2·13합의(2007), 2·29합의(2012) 등 주요합의가 ‘동결 대 보상’ 방식의 미봉책이었으며,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한 문제를 뒤로 미뤄 놓았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미국의 ‘우려사항’과 북한의 ‘요구사항’을 교환하는 ‘안보-안보 교환협상’을 시도했지만 '하노이 노딜'로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고수할 경우 남북관계 복원은 쉽지 않을 것이다. 북미 적대관계 해소와 같은 근본문제를 뒤로 미루고 평화경제론을 앞세우는 이전의 협력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김정은 시대 달라진 북한의 생존전략을 면밀히 검토하여 북한의 관심을 끌 만한 창의적인 구상을 내놓아야 한다. 근본문제인 북미 적대관계 해소가 이뤄져야 북한이 사상이론적 조정을 하고 남북관계 복원에 적극성을 보일 것이다.
새 정부가 우선 당장 취해야 할 조처는 대북 전단과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군 통신선 연결 등 소통창구를 마련하기 위한 남북접촉과 대화를 서둘러야 한다. 이전 정부 시기 ‘9·19 군사합의’의 효력을 중지하고 ‘김정은 정권종말론’과 ‘대한민국 괴멸론’으로 대치했던 남과 북이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바로 만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펴고 있어 지도부 수준에서 대남노선을 변경하지 않는 한 민족 내부의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관점에서의 남북관계 복원은 어려울 것이다. 북한이 대남정책을 바꿀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신뢰조성에 힘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부가 일부 단체의 대북전단 살포 중단을 강력히 요청한 것은 바람직한 조처다.
필자 주요 이력
▷전 통일연구원장 ▷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전 청와대 안보실 정책자문위원장 ▷현 국회 한반도 평화외교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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