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세전쟁을 잠시 멈추기로 합의한 미국과 중국이 이번엔 세계보건기구(WHO)를 둘러싸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미국은 WHO 회원국들에 ‘탈퇴 동참’을 촉구하며 WHO 밖의 새로운 국제적 보건 협력 네트워크 구축을 구상하고 있고, 중국은 이틈을 노려 WHO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모양새다.
20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폴리티코 등에 따르면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 미 보건장관은 이날 스위스 유엔 제네바사무소에서 열린 WHO 연례 회의인 세계보건총회(WHA) 영상 연설에서 “미국의 (WHO) 탈퇴가 각국의 보건부 장관들과 WHO에 경고의 신호가 되길 바란다”면서 “이미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과 접촉 중이다. 다른 나라들도 우리와 함께할 것을 고려해 달라”고 했다. 미국과 함께 WHO에 탈퇴한 것을 촉구한 것이다. WHO의 최대 재정 후원국이었던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첫날 서명한 행정명령에 따라 2024년과 2025년 분담급 납부를 중단하고 탈퇴 절차를 밟고 있다.
미국이 WHO 회원국에 ‘탈퇴 동참’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이미 중국의 영향력이 막대해진 WHO를 축소시키고, 이에 대항하는 새로운 국제 보건 기구 설립을 구상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케네디 장관은 “우리는 제약회사, 적대국, 그리고 그들의 (비정부기구) 대리인들의 부패한 영향력에 의한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국제 보건 협력을 해방시키기 원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폴리티코는 “WHO에 대항하는 국제적 보건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노력을 보여준다”고 분석했다.
반면 중국은 미국의 탈퇴 선언으로 재정난에 직면한 WHO의 구원투수를 자처하며 WHO, 나아가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다. 류궈중 중국 국무원 부총리는 같은 날 WHA 연설에서 “중국은 앞으로 5년간 WHO에 5억 달러(약 6973억원)를 추가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어 “일방주의와 힘의 정치가 세계 보건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다자주의뿐”이라며 “이번 기부를 통해 WHO가 독립적이고 전문적이며 과학적 원칙에 따라 운영될 수 있도록 보장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번 중국의 추가 기부가 확정되면 중국은 WHO의 최대 기부국으로 올라서게 된다. 류 부총리는 케네디 장관이 주장한 실험실 유추설에 대해서는 “중국은 코로나19와 관련해 책임 있고 건설적인 태도를 보여왔다”며 “중국을 중상모략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현재로선 미국의 새로운 국제적 보건 협력 네트워크 구축 구상은 국제사회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미국우선주의를 제창하며 취임과 동시에 WHO를 비롯해 파리기후협약 등 주요 국제기구를 탈퇴하고, 관세 전쟁을 촉발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케네디 장관의 연설에 대한 반응 역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로이터는 “외교관과 장관들은 대부분 침묵 속에서 연설을 지켜봤다”면서 “즉각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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