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늦으면 안 됩니다. 제조 단가가 비싼 게 문제면 그만큼 더 좋은 제품으로 승부를 보면 됩니다."
약 10년 전 미국 테네시주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이하 한국타이어) 공장 설립 당시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이 주요 임원진을 설득하며 한 말이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국타이어 관계자는 "그때만 해도 대체지가 많았기 때문에 8억 달러(약 1조원)를 들여 미국에 공장을 설립하는 결정은 쉽지 않았다"면서 "미국에 생산기지가 있어야 글로벌 완성차 공급망을 뚫을 수 있고, 한국타이어도 세계적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게 회장님의 판단"이라고 기억했다. 공장 위치를 기아자동차 공장이 있는 조지아주가 아닌 글로벌 완성차 생산기지인 테네시에 설립한 것도 조 회장의 안목이었다. 그는 "만약 그때 오너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난 지금의 한국타이어도 존재하지 않았고, 미국에 생산 기지가 없어 관세를 그대로 때려 맞아야 하는 운명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땐 틀렸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맞는 일들이 있다. 수조 원이 오가는 경영 판단일 때는 그 결정에 대한 무게가 더 무겁다. 이제야 조 회장 일화가 회자되는 이유는 한국타이어의 행보가 안팎으로 불안한 지금의 한국 상황과 비슷해서다. 한국타이어는 밖으로는 미국의 관세로 인한 완성차 판매 둔화와 부품가격 인상이라는 악재를, 안으로는 흩어진 계열사별 시너지를 통합해야 하는 도전 과제에 직면해 있다. 숫자를 보면 위기가 더 극명하다. 올 1분기 이 회사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4조9636억원, 3546억원으로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33.3% 늘었지만 영업이익은 11.1% 줄었다. 치솟는 원자재 값과 운임비, 최근 자회사로 편입된 한온시스템의 장기적 실적 부진이 원인이다.
격랑에 휩싸인 한국타이어호를 이끌 선장은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혀 있다. 조 회장은 오는 29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배임) 혐의로 1심 판결을 받는다. 2014~2017년에 걸쳐 계열사를 부당 지원해 한국타이어에 손해를 입히고, 회사 자금을 개인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유용한 혐의다. 앞서 검찰은 조 회장의 죄질이 불량하다며 징역 12년과 7896만원 추징을 구형했다. 조 회장은 지난달 최후진술에서 "경영 투명화에 소홀했던 것은 모두 제 불찰"이라며 "부디 동료들에게만은 최대한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했다.
물론 조 회장이 저지른 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다만 동시에 건강한 사회라면 사법적 판단이 경제적 파급 효과 및 공익적 가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지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한국타이어가 수년간 수출 확대, 일자리 창출, 기술혁신 등 다방면에서 국가 경제에 기여한 측면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조 회장은 위기 속에서도 조직 재정비,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경영 전략으로 한국타이어를 글로벌 기업으로 체질 개선하는 데 성공한 성과도 있다. 특히 친환경 소재 개발, 글로벌 공급망 강화, ESG 경영, 디지털 전환 등에서 보여준 탁월한 민첩함은 다른 '오너 2세' 경영진과 다른 행보다.
우리 기업들은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 환경 속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며 외화벌이를 하고 있다. 한 치 앞도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임직원만 5만명을 거느린 한 기업의 오너가 사법 리스크로 발목이 잡힌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 문제가 아닌 기업 전체, 더 나아가 수많은 협력사와 고용된 근로자들 생계와도 직결되는 문제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오너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부디 사법부가 과거의 그림자에 매몰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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