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계 거장 사카모토 준지 감독(65)의 서른 번째 작품 '오키쿠와 세계'가 지난달 21일 국내에서 개봉했다. 이를 기념해 내한한 사카모토 감독과 지난달 26일 서울 동작구 한 카페에서 인터뷰했다.
사카모토 감독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영화를 제작하면서 내일의 불안함과 위기감을 느꼈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상황 가운데 희망을 담고 싶었다”며 “‘내일 세상이 끝나더라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던 어느 위인의 말처럼 절망 가운데 희망을 잃지 않는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일본 19세기 에도 시대 도시에서 인분을 수거해 농사꾼들에게 거름으로 되파는 분뇨업자 야스케와 츄지, 그리고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의 외동딸 오키쿠 간의 사랑과 우정을 담은 세 남녀의 청춘을 그린다.
그는 “등장 인물들은 가난과 차별 속에서 혐오와 멸시를 받는 최하층민이지만 억압된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며 “주인공의 순수하고 당찬 모습들을 의식적으로 영화에 담으려 했다”고 답했다.
특히 당시 신조어였던 ‘세계’란 단어가 여러 번 강조된다. ‘세계’는 단순히 지리적 개념을 넘어 사랑, 순환, 연결성을 상징한다. ‘세계’라는 단어의 뜻을 그저 어렴풋이 이해하지만 ‘세계’에서 당신이 제일 좋다고 고백하는 츄지와, “저쪽으로 가면 반드시 이쪽으로 돌아온다”고 말하는 한 승려의 ‘세계’에 대한 정의를 통해 세계는 결국 연결돼 있다는 의식을 보여준다.
사카모토 감독은 "영화를 제작할 때 항상 동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세계에 대해 인식하며 만든다. 현재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가난 같은 일들이 '나'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닌, 나와 같은 땅으로 이어져 일어나는 일들이란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오키쿠와 세계'는 좁은 화면비의 흑백 영상으로 영화에 담백함을 더했다. 그는 “흑백영화는 색이 없기에 오히려 더 풍요롭게 느껴진다. 색채의 정보 없이 인물의 표정과 자연의 풍경, 나뭇잎이 출렁이는 장면들이 마치 살아 있는 언어처럼 생동감 있게 표현된다”고 흑백영화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1973년 도쿄 김대중 납치 사건을 다룬 한·일 합작영화 'KT'(2002년)로 베를린영화제에 초청된 사카모토 감독은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그는 2011년 배우 유지태 주연 DMZ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당시 한국 스태프의 자세와 프로 의식에 감탄했다고 회상했다.
“지금까지 태국, 러시아, 쿠바 등 여러 나라에서 공동작업을 하면서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기본적인 도구는 같지만 제작 방식이라든지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러한 갭(간격)을 즐기는 편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스스로 변화하는 기회가 되고, 긍정적인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공동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카모토 감독은 “영화 제작에 3년이 걸렸다고 얘기하지만 실제 촬영 일수는 12일밖에 되지 않는다. 세트 평면도, 장면의 해설 샷과 카메라 위치를 모든 스태프들이 미리 숙지할 수 있게 사전에 배포해 배우가 대기하는 시간을 줄이고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촬영에 임한 결과”라고 말했다 .
영화 속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모습을 따뜻한 관점으로 섬세하게 그린 사카모토 감독의 놀라운 통찰력과 등장 인물들이 보여주는 순수함의 울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긴 여운을 전한다. 내일의 희망을 찾는 청춘들의 모습은 수백 년 전에도, 현재의 우리에게도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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