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갈림길에 선 K-배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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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란 기자
입력 2023-12-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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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용문(登龍門)은 출세의 문을 뜻한다. 중국 황하에 용문(龍門)으로 불리는 협곡이 있는데,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다. '용문점액(龍門點額)'은 잉어가 급류를 타고 힘차게 뛰어올라 용문을 통과하면 용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마(額)에 상처(點)만 얻고 하류로 떠내려간다는 전설을 뜻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 경제·경영 전문가 90명에게 내년 경제 키워드를 조사한 결과 용문점액이 꼽혔다. 내년 우리 경제가 새로운 도약을 해내거나, 중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질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의미다. 

한국 배터리 업계가 처한 현실이 그렇다. 작년까지만 해도 '기술 우위' '기술 초격차'를 외치며 승천할 것만 같았던 K 배터리의 기세는 중국에 밀리고 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10월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시장에서 LG에너지솔루션은 점유율 27.7%를 기록했다. 이를 CATL(27.6%)이 바짝 쫓고 있다. 조만간 LG에너지솔루션이 왕좌를 뺏길 수 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까지 흘러나온다. 

게다가 올해 윤곽이 드러난 미국 IRA(인플레이션감축법) 등 지정학적 변수와 올해부터 저성장 국면에 들어선 전기차 시장 등 다양한 대외 변수가 국내 배터리 산업을 위협하고 있다.

IRA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배터리 부품은 2024년, 니켈·리튬 등 핵심 광물은 2025년부터 중국 자본의 지분율이 25%를 넘는 합작사에서 조달하면 안 된다. 국내 양극재 4사 중 엘앤에프를 제외하고 LG화학, 에코프로, 포스코퓨처엠은 모두 중국 기업과 합작을 진행 중으로, 지분율 조정을 위해 수천억원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다. 

중국 기업은 IRA에도 아랑곳 않고 글로벌 투자를 늘리고 있다. CATL과 BYD는 북미에 배터리 공장을 신설하려는가 하면, 유럽에서는 EVE, 에스볼트 등 신생 중국 업체들이 배터리 공장 신·증설에 나섰다. 

이는 최근 살림을 줄이고 있는 K배터리와는 상반된 모습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각각 완성차 업체와 짓기로 한 합작공장 설립 계획을 철회하거나 연기했다. 또 양사는 미국 공장에서의 인력 구조조정도 단행했다. 

외부의 우려와 달리 배터리 관계자들은 현재의 상황을 "내실을 다질 기회"라고 보고 있다. 수년간 거듭된 대규모 투자와 그에 따른 재무 부담, 가동률 저하, 인력 수급 등의 부작용을 바로잡으며 도약할 준비를 마련하겠다는 얘기다.

최근 양극재 업체 관계자를 만나 등용의 기회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기술이 전부다"라고. 

중국이 장악한 리튬인산철(LFP) 시장에서는 에너지 밀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기술 격차를 내고, 한국이 주력하는 삼원계 배터리 시장에서는 하이니켈을 너머 울트라니켈로 중국을 따돌리겠다는 설명이다. 현재 중국이 공급하는 삼원계는 미드니켈로, 3년 전 기술에 머문다. 아무리 전기차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중요해진다고 해도, 안전 및 주행력과 이어지는 기술에서 타협할 순 없다는 얘기다.

자원빈국인 한국은 수년간 쌓아온 기술력으로 지금의 배터리 강국이 됐다. 2000년대부터 이어온 배터리 개발 역사 속에서 숱한 좌절이 있었을 것이다. 실패를 아는 인재가 위기에 강하듯, 불황을 견디는 방법은 우리나라 기업들이 가장 잘 안다. 배터리 업계가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무사히 용문을 넘을 수 있길 응원한다.
 

산업부 김혜란 기자
산업부 김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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