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의 '가로세로'] 광릉-세조임금과 월운 스님의 한글사랑이 어우러진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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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입력 2023-06-26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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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 스님]




광릉내(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인근 지역의 새로 짓는 아파트는 분양 광고할 때 ‘숲세권’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것도 그냥 숲이 아니라 ‘왕의 숲’임을 엄청 강조한다. 왕숙천에는 ‘왕의 꽃길’을 조성했다. 이제는 제왕까지도 광고의 매개체로 삼아 소비자를 모으고 홍보를 통해 관광객을 부르는 시대가 되었다. 졸지에 소환당한 주인공은 조선의 일곱 번째 왕 세조(1417~1468 재위1455~1468)임금 이시다.

 

광릉 홍살문 정자각



광릉숲은 동서 4km 남북 8km의 규모로 포천과 남양주 그리고 의정부에 걸쳐있으며 여의도 30배 면적인 약 31만평이라고 한다. 1468년 능림(陵林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숲)으로 지정된 이후 550여년간 자연 그대로 보존된 탓에 뒷날 유네스코 생물보존권 지역으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현재 광릉 숲 안에는 국립수목원과 연구소, 산림박물관, k대 평화복지대학원 등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자연 숲과 별로 어울릴 것 같지도 않는 건물들의 부조합도 용납되는 걸 보니 임금님의 품안이 참으로 넓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된다. ‘모두 나의 백성이니라’라고 하면서도 그 시절 같았으면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시설이었을텐데 오백년이 흐르다보니 서슬 퍼랬던 왕도 이제는 마음이 많이 관대해지셨나 보다. 뿐만 아니라 관통도로의 교통량도 만만찮다. 자동차의 소음과 매연이 왕릉의 편안한 잠자리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지도 염려된다. 왕도 백성을 걱정해야겠지만 백성도 왕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세조임금 왕릉


 
왕릉인 광릉(사적197호)은 세조임금에서 시작된다. 생전에도 이 숲을 매우 좋아하셨다고 한다. 활쏘기를 좋아하여 사냥터 삼아 종종 다녀갔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터는 이미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동래정씨 정찬손 선생의 선영이었다고 한다. 왕릉을 모시면서 정씨 선영을 옮겨야만 했다. 뒷날 왕후릉도 들어왔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각각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二岡陵)이다. 비용절감을 위하여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두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나무관을 구덩이에 넣고 그 사이를 회다짐으로 메우는 회격(灰隔)방식은 노동인원을 절반으로 줄이는 경제적 효과로 이어졌다.
 
당신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특히 한글사랑은 유별났다. 왕자시절에도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으며 창제 직후 시험삼아 언해(諺解 한글번역)한 『석보상절』과 『월인석보』를 편찬할 때도 힘을 보탰다. 왕위에 오른 뒤에는 본격적으로 훈민정음 보급을 위해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1461년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했고 10여종 중요한 경서를 엄선하여 언해(諺解 한글번역)했다. 이 책들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중세국어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학인시절 간경도감에서 나온 언해본을 읽기 위해 국어고어사전을 마련했던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현재 언해본 원본은 거의 국보 내지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11년간 지속된 사업으로 고승과 이름난 유학자 20여명이 번역에 참여하였으며 특히 구결(口訣 한문원문 문장이 끊어지는 부분에 우리 말로 토를 다는 일)작업에는 세조가 직접 관여 했다. 그 밖에 역부(役夫 뒷바라지하는 인부) 장인(匠人 종이, 먹, 책 등을 만들고 인쇄하는 기능직)등이 170여명으로 도합 200여명에 육박하는 거대한 조직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고 등극 이전 그리고 이후에도 집현전 학사인 김수온의 형 신미(信眉 본명:김수성)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한글창제 및 번역에 관한 많은 자문을 받았다.
 
광릉내에는 969년 고려 때 창건된 운악사(雲嶽寺)가 있었다. 능림(陵林 왕릉을 보호하기 위한 숲)지정 이듬 해 1469 세조의 능찰(陵刹 왕릉을 수호하는 사찰)로 중창 한 후 임금의 진영(초상화)을 모신 숭은전(崇恩殿)을 건립했다. 얼마 후 현판을 봉선전(奉先殿)으로 바꾸었다. 사찰이름도 자연스럽게 ‘봉호선왕지능(奉護先王之陵 선왕의 능을 받들어 보호함)’이란 의미를 지닌 봉선사(奉先寺)로 바뀌었다. 당시에 만든 범종이 현재까지 남아서 소리로써 긴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월운스님 거처 다경실 흰고무신만 댓돌 위에 가지런하다



봉선사에서 반백년을 머물렸던 월운(月雲1929~2023) 노사(老師)는 스승이신 운허(耘虛 1892~1980 독립운동가.번역가)스님의 뒤를 이어 동국역경원장을 맡아 한글대장경 318책을 완간했다. 그리고 봉선사에 학림과 서당을 개설하여 수많은 번역인재를 양성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세조임금의 한글사랑이 오백년 후까지 고스란히 남아서 오십년 역경(譯經)사업을 보이지 않는 힘으로 외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 모자라는 능력을 돌아보지 않고 호기롭게 번역한 책을 우편으로 스님께 보냈다. 얼마 후 칭찬과 격려말씀이 함께 담긴 친필 엽서가 도착했다. 어른께서 지닌 후학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인연이 닿지 않아 직접 당신 앞에서 책을 펴고서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가끔 봉선사로 와서 인사 올리는 것으로 대신했다. 하지만 이 절 저 절에서 당신이 배출한 승가의 제자들과 늘 도반이 되어 서로 탁마하면서 함께 지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재가제자들의 뛰어난 안목도 번역이 막힐 때마다 늘 큰 힘이 되었다. 친구의 친구가 친구인 것처럼 제자들의 도반 역시 제자나 다름없으리라.
 
남겨두신 사세게(辭世偈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씀)를 가만히 음미해 본다. 첫구절은 ‘사승비승사속비속(似僧非僧似俗非俗 승려이면서 승려가 아니고 속인이면서 속인이 아니다)’라고 했다. 교리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승(僧)은 진리의 세계(진제眞諦), 속(俗)은 현실세계(속제俗諦)를 말한다. 따라서 진(眞.출가승)과 속(俗.세간인)을 동시에 벗어나면서도 또다시 그 둘 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살았다는 ‘진속불이(眞俗不二. 진과 속은 결코 나누어 질 수 없다)’의 수행경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비가 조금씩 오락가락하긴 하지만 대체로 흐린 날씨를 유지하는 날(2023년 6월21일 수요일) 월운 대강백(大講伯)의 다비식(장작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불교 화장의식)을 마친 후 서울 조계사로 돌아오는 길에 세조왕릉을 찾았다. 두 어른의 한글사랑에 다시금 감사를 드리면서 두손모아 고개를 숙였다.

 

봉선사 월운스님 빈소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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